[노성열의 AI경제] 유럽의 통찰서 얻는 교훈…민주주의 바꿔갈 AI

KPI뉴스 / 2024-12-19 15:40:27

우리 국민과 세계를 놀라게 한 '3시간 깜짝 계엄'의 배경 중 하나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대통령은 야당이 총선을 조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져 계엄군으로 하여금 선거관리위원회 서버를 장악하려 시도했다. 긴급 담화에서 "국가정보원 직원이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다"고 근거까지 밝혔다. 선관위가 곧 반박했으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공정 선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극명한 사례였다.

 

▲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있다. [뉴시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미국도 이번 트럼프 2.0의 직전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당선되자 트럼프 표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에 일부 극렬 지지자들이 의회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그 앞에는 힐러리 클린턴을 물리치고 트럼프가 처음 당선됐을 때 러시아가 미 대선에 해킹 등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지난 3월 중국이 영국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자 개인정보를 해킹해 사이버 공격을 일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일에서는 친중·친러시아 유럽의회 의원이 금품을 제공받거나 정보를 빼돌린 혐의로 체포당한 일도 있다. 올해는 전 세계 49개국에서 인구 40%가 투표를 했던 '글로벌 선거의 해'였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절차인 선거에서 공정성을 의심받는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이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이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 분석한 최신 보고서를 내놓아 주목된다. 한국에도 참고할 점이 많은 자료를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안솔비 연구원의 동향 보고를 인용해 요약 소개한다. 안 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10월 유럽의회의 기술영향평가(European Parliamentary Technology Assessment) 그룹이 발간한 '인공지능과 민주주의(Artificial Intelligence and Democracy)' 보고서는 신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 정책까지 제시했다.

 

보고서는 유럽 내 19개 회원국의 정부 기관이 AI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종합 분석했는데, 안 연구원은 이를 정부, 선거, 거버넌스 부문으로 나눠 정리했다. 크게는 고령화 및 노동인구 감소로 '실질 생산성 저하'란 고질병에 시달리는 유럽이 경제 성장과 더불어 탄소배출 감축 목표도 달성하고, 러시아 등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AI를 적극 활용하려는 진흥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러나 동시에 가짜정보 등 AI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규제 역시 작동되고 있다.

 

정부는 기업 못지않게 방대한 양의 서류를 쉴 새 없이 생산한다. 흔히 관료주의로 불리는 '정보 산더미'는 행정 소비자인 국민은 물론, 생산자인 공무원조차 전체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다. 유럽 각국은 AI의 대규모 언어모델(LLM)을 의회와 공공부문에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의회에서 음성 인식으로 회의록 작성·번역 같은 단순 업무부터 방대한 자료를 AI 모델로 학습시켜 법안 요약 및 분석, 정책 의사결정 지원 등으로 활용을 넓혀간 사례를 보자.

 

프랑스 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자체 언어모델 'LLaMandement'를 개발해 2024년 2월 예산안 작업에 처음 도입했다. 단 15분 만에 1만 개 이상의 법안을 요약, 분석해 적합한 해당 정부기관에 보낸다. 프랑스는 정부 부처와 의회 위원회 등으로 적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노르웨이 외교부도 연간 6000건 이상의 해외공관 보고서를 분류, 요약, 검색하는 데 AI를 활용하고 있다. 덴마크 지방정부협의회는 'KommuneGPT'라는 자체 모델을 개발해 각 지방정부의 데이터를 학습시켜 법안, 행정 지침, 지방정부 의결 내용을 학습함으로써 행정 효율을 높이는데 쓸 예정이다.

 

AI 아바타도 선거에서 활용됐다. 스위스에서 언어장애를 가진 정치인이 AI로 자신의 정책을 말로 설명했다. 언어모델뿐 아니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인공위성 이미지 분석용 AI로 허가받지 않은 건축물을 찾아 세금을 부과한 결과, 2023년에만 무허가 수영장의 부동산세로 약 4000만 유로를 징수했다.

 

이와 동시에 편향성, 환각 등 AI 기술의 한계로 부작용 역시 상당하다. 오스트리아 공공고용서비스(AMS)는 직무 프로필, 교육기회, 급여수준, 직업훈련 등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AI 챗봇을 내놓았으나 청년들에게 직업을 추천해 주는 답변에서 젠더 편향성이 나타나 비판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공공부문에 생성형 AI를 도입하는데 데이터 보호와 알고리즘 영향력 평가를 의무화하고 있다. 챗GPT와 미드저니는 기준에 미달해 원칙적으로 공공부문에서 쓰지 못한다. AI 딥페이크와 고의적 역정보(disinformation) 생성은 선거에서 정적을 공격하는데 악용된다.

 

이 같은 AI 역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 '디지털 회복탄력성(digital resilience)'이 중요하다고 보고서는 강조하고 있다. 특히 1개 기관에서 포괄적 규제를 하는 것보다 여러 기관의 정책 조합을 병행하는 게 효과적이다. 디지털 회복탄력성은 한 사회에서 AI를 포함한 디지털 부문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시스템을 복구하는 능력을 뜻한다. 집중형보다 분산형이 회복이 빠르다는 건 초기 인터넷망 구축에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그래서 유럽 각 정부는 다양한 AI 거버넌스로 분산형 규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프랑스는 장관급 AI 부서를 신설했으며, 스페인은 AI 감독청(AESIA)에서 AI 도입 관리와 개선을 추진 중이다. 영국도 AI 안전연구소를 설립해 AI 기술의 위험을 평가하고 있다. 거버넌스뿐 아니라 규제법과 제도 역시 속속 도입 중이다. 프랑스는 2024년 5월 AI의 정치적 활용을 규제하는 디지털공간규제법(SREN) 개정을 단행했다. 스페인은 6월에 딥페이크 범죄화 법이 입안됐다. 스웨덴은 2022년부터 국방부 산하 심리전 부서를 두고, 영국은 2023년부터 역정보대응단을 운용하고 있다. AI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폴란드, 스위스, 노르웨이 등은 자국 언어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된 LLM의 개발도 지원하고 있다.

 

유럽의 공공부문 AI 활용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가 각종 행정 서비스와 업무처리에 혁신을 모색하고 있으나 아직 AI 기술의 정부 도입은 미비한 상태다. 의회 입법이나 사법부 행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최근 '스마트 물 관리' 분야에서 AI 정수장 국제표준화를 제안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낡은 제도와 구습에 발목을 잡혀 주춤하고 있는 이때, 디지털 AI 혁신으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 중인 유럽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분야를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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