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의 AI경제] '법 비만' 중병 걸린 대한민국

KPI뉴스 / 2024-10-04 11:17:56

법치주의가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실정법을 무시한 '자의(恣意) 법', 상식을 외면한 '떼 법'이 난무하던 군사독재와 우민(愚民) 포퓰리즘 시대의 갈망이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실재하는 법규를 우회하는 편법, 모르는 척 어기는 탈법, 아예 대놓고 자행하는 불법을 일삼을 때 국민은 '법에 의한 지배'를 목말라했다. 행정부의 무소불위 폭주를 국회가 대의 입법으로 예방하려, 사법부는 법과 양심에 의한 재판으로 사후 저지해보려 했던 산업화 시대의 추억이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법치의 보루로 신뢰받았다. 반대로, 민주화 시대에는 법과 절차에 따른 정상적인 국정 참여보다 민의를 직접 실천한다는 명분의 장외투쟁이 법외법(法外法)으로 신봉됐다. 확성기와 촛불을 동원한 길거리의 큰 목소리가 자연법 우위를 외치며 이른바 법 기능주의에 치우친 정부의 악법에 맞섰다. 입법부와 사법부도 서서히 이념에 물들며 공정한 법의 수호자 자리를 잃어버렸다. 

 

이윽고 민주화 세대가 거듭 집권에 성공하며 3부 요인을 제 사람으로 채우는 민주 독재까지 감행하자 말 없는 다수는 이들의 언행 불일치 위선에 질렸다. 이를 막기 위해 껍데기 법이 아닌, 참된 적법과 준법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 법 관련 이미지 [픽사베이]

 

근대국가의 3권 분립 권력구조에서 행정부를 제외한 입법부와 사법부에 '법'이 들어간 이유는 절대왕권의 무법천지에 맞서는 최소한 저지선이 법치주의였기 때문이다. 왕이 멋대로 과세조항을 신설하고 맘에 안 드는 정적은 처형하는 전근대적 통치에 분노해 "대표 없이 과세 없다"며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만들었다. 배심원(영미법), 법관(대륙 법)을 독립시켜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는 법원으로 개혁했다. 법에 의한 지배, 즉 법치는 민주주의의 골격이자 운영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1789년) 후 200여년이 흐른 21세기 초, 이제는 법 만능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법이 없어 최소한의 법을 요구하던 근대에서 법이 넘쳐 모든 것을 법의 이름으로 휘젓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로 넘어온 것이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국민 뜻과 동떨어진 정쟁 법을 만들고 정부 법안은 통과시키지 않는 '입법 정치'에 앞장선다. 사법부도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보다 자의적 해석과 개인 소신에 치우친 '사법전횡'으로 빠진다. 이 모든 현상은 법이면 다 된다는 과잉 법치의 부작용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이 국회 미래연구원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21대 국회의 법안 통과 건수는 9063건으로 같은 기간 미국(709건), 독일(473건), 일본(377건), 프랑스(243건), 영국(139건) 다섯 나라의 입법 실적보다 5배나 많다. 한국이 드디어 선진국보다 월등한 법치주의 국가가 된 것일까. 과거 국회의원이 임기 중 법안 한 건 발의하지 않는 세금도둑으로 지탄받던 악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이 열기는 22대에도 이어져 개원 100일 만에 벌써 3974건의 개정 법안이 발의됐다고 한다.

 

국회의원이 본업인 법률 만들기에 열중하는 이 사태를 흐뭇하게만 바라보기엔 어려운 모순이 있다. 박상훈은 시선을 살짝 틀어 일반시민이 법에 호소하는 검찰 고소·고발과 법원 사건 접수 건수도 살펴봤더니 이 또한 선진국의 수배에서 수십 배에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법관 사건 처리건수도 훨씬 많다. 그는 무수히 법을 만들고 이 법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국 사회를 민주주의의 본령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 '법대로 하자'며 막무가내로 승패를 가리려는 끝장 대치는 화해와 조정의 협치, 즉 정치 실종을 불렀다. 이는 갈등을 합리적 대화와 계약이 아닌, 법적 투쟁으로만 해결하려는 시민 법전(法戰)으로 이어졌다.   

 

곰곰이 따져보라. 지금 대통령과 내각 구성원, 여야 정당 대표 및 주요 당직자는 소수의 예외를 빼곤 모두 법률가들이다. 변호사, 검사, 판사와 법대 교수 출신이 국정을 맡고 있다. 이를 법치주의의 구현이라 반겨야 할 것인가. 국가권익위원장을 역임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 법대 특강에서 후배들에게 "여러분은 부모님의 미흡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농담 섞인 진담을 건넨 적이 있다. 과학기술 경제와 문화예술 소프트 파워로 무장한 21세기 신흥 국가로 올라서려면 더 많은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필요하지, 법률가는 소수만 있으면 된다는 취지였다. 최소한의 상식에 불과한 법은 관리형 수재에게 맡기고, 과학과 예술 같은 창의적 분야에 더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진출하길 바란다는 인생 선배의 충고 같은 말이었다. 법으로 일가를 이룬 큰 법조인이 스스로 법률 인생을 돌아보고 막 출발한 후배에게 건넨 덕담이었다. 

 

다시 국정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헌법과 법에 규정돼 있다며 여야는 준법투쟁을 일삼는다. 거대 야당은 특검과 탄핵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법률안 재의요구(거부)권과 방어적 행정 입법으로 간신히 맞서고 있다. 양쪽 모두 민주주의가 정말로 위기에 처했을 때나 발동하라고 법전 귀퉁이에 마련해둔 비상수단을 밥 먹듯 갖다 쓰고 있다. '법대로' 한다며 국회는 관행을 무시하고 자리 배분과 의사진행에서 다수당 독재를 휘두른다. 행정부는 국정의 발목을 잡는 입법부 탓이라며 낙제점 변명에 급급하다. 사법부는 공정·신속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법의 마지막 수호자란 권위에 흠집이 났다. 법률가들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지도층이 법 기술자, 법 마술사 비판을 들으며 오로지 법의 외피로 둘러싼 고구마 질식 정국을 만들고 있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인 보통 국민은 법 몰라도, 법 운운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상식적인 나라살림을 보고 싶다. 머리채를 잡고 뒤엉켜 싸우는 법비(法匪)는 이제 보기도 싫다. 한비자의 법가는 지나치게 엄격한 법 집행과 법 만능주의로 공포 정국을 이끈 끝에 백성의 신망을 잃고 망했다. 공자의 유가는 이상적인 덕치를 제시해 현실에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집권자와 유권자의 마음을 함께 얻어 오래 지속되는 사상으로 남았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는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태어날 때의 원래 모습으로 다이어트 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법 영양실조 시대를 넘어 법 비만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는 성인병을 앓고 있다. 지금 법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건강한 중·노년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분야를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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