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때 19만7449명, 세종 때 32만2460명 동원해 도성 축조
'하루 18시간 허용' 가혹한 장시간 노동에 도망자·사상자 속출
한양도성에 깃든 수많은 백성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해야
조선 건국 직후인 1396년(태조 5) 전라도 진원군(오늘날 전남 장성)에 사는 도리장(都里莊)이라는 여성에게 가슴 철렁한 소식이 전해졌다. 성 쌓는 부역에 동원돼 멀리 한양으로 불려간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통곡한 도리장은 남자 옷으로 바꿔 입고 그날 바로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성을 쌓다 병든 백성을 돌보던 시설인 판교원(板橋院, 지금의 경기 성남 판교동에 있었음). 도리장은 그곳에서 위중한 부친을 보살피고 부축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 |
| ▲ 한양도성 중 청와대 뒤편 북악산 북측면 구간. 1968년 1·21사태 후 일반인 출입이 제한됐다가 52년 만인 2020년 11월 시민에게 개방됐다. [뉴시스] |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이 전하는 한양도성 축조 시기의 풍경 중 하나다. 편찬자들이 '실록'에 도리장 부녀 이야기를 실은 건 효를 장려하는 차원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이 이야기는 도성 축조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단했던 삶을 증언하고 있다.
수도를 둘러싼 성곽인 한양도성은 태조 때인 1396년 평지엔 흙으로 쌓은 토성, 산지엔 돌로 쌓은 석성 형태로 처음 축조됐다. 오래지 않아 일부 구간에 문제가 생겨 세종 때인 1422년(세종 4)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한편 모든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조선 후기에 정비 작업이 몇 번 진행되지만, 한양도성의 기본 틀은 태조·세종 때 마련됐다. 도성 축조는 전국에서 불려 온 수십만 백성의 손으로 이뤄졌다. 태조 때 19만7449명, 세종 때는 32만2460명이 동원됐다. 이 중 세종 때 상황을 되짚으며 당시 백성의 처지를 헤아려보자.
공사 시기는 1422년 음력 1~2월이었다. 농한기여서 이때를 택했다고는 하지만, 겨울 추위는 동원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힘든 부역으로 통하던 성 쌓기에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고도, 병자를 치료할 의원을 충분히 배정하지 않은 것 또한 문제였다.
조정은 전체를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별 담당 군현을 정해 공사를 맡겼다. A 구간을 B 군현에 배정하면, B 군현 수령이 지역 백성을 동원해 축성과 사후 보수까지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조정은 수령들에게 '돌 한 개라도 무너지면 죄를 묻겠다'는 지침을 내렸다.
수령들은 백성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켰다. 1396년 축성 공사 때도 수령들이 밤낮없이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 문제가 됐는데, 1422년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정은 수령들에게 완화책을 지시했다. 통금 시간, 즉 인정(밤 10시경)과 파루(새벽 4시경) 사이에는 부역을 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루 18시간은 일을 시켜도 좋다는 것이 완화책이었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부과된 장시간 노동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니 도망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엄벌 방침을 천명했다. 도망가다가 걸리면 첫 번째는 곤장 100대, 두 번째는 목을 베는 참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집단 이탈하면 추적·체포 후 한양으로 압송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도망은 끊이지 않았다.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조정에 공식 보고된 공사 기간 중 사망자만 872명에 이르렀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희생인데, 더 큰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희생된 사람들은 872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록'에는 동원된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길에서 또는 집에 돌아가서 죽은 사람 또한 매우 많았다고 나온다. 인원수가 기록돼 있지 않기에 플러스(+)알파가 될 법한 사례들이다.
울산의 이름 모를 아버지와 아들도 그중 하나다. 부자는 함께 공사에 동원됐지만, 함께 살아 돌아가지는 못했다. 아들은 아버지 시신을 업고, 자기가 먹는 밥으로 길에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며 고향으로 향해야 했다.
대규모 사상자 발생은 백성을 만만하게 여긴 상당수 관리들의 인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일부 수령은 백성들이 부역으로 인해 병든 것을 알면서도 치료소에 보내지 않고 죽게 만들기도 했다. "500~600명 죽는 것이 무엇이 괴이합니까"라고 말하는 중앙 관리도 있었다.
![]() |
| ▲ 1422년 한양도성 공사 당시 지역별 구간 분담 및 동원 인력 현황.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에서 편찬한『서울 한양도성』39쪽 그래픽 갈무리.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 |
이처럼 한양도성은 수많은 백성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자양분으로 축조됐다. 세종 때만 '872명+알파'에 달한 사망자 수는 다른 시기의 공사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을 기억하는 목소리는 드물다. 한양도성을 다룬 자료는 많지만, 백성의 고통에 주목한 경우는 만나기 어렵다. 주목하기는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게 훨씬 많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봄이다. 한양도성을 거닐기 좋은 때가 올해도 찾아왔다. 이번엔 도성 축조 과정에서 희생된 백성들을 생각하며 걸어보는 건 어떨까. 도리장 부녀의 심경을, 아버지 시신을 업고 돌아가야 했던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걸으면 한양도성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요 참조=『서울 도성을 품다』(서울역사박물관, 2012), 『서울 한양도성』(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 2015), 김윤주 논문(「조선 태조~태종대 한양 건설 공역의 인력 동원과 물자 수급」, 『조선시대사학보』 86, 2018), 『조선왕조실록』
KPI뉴스 / 탐사보도부 김덕련 기자 kdr@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