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의병, 1908년 대규모 국내 진공 작전
홍범도 등 국내 의병과 공동 전선 구축 전략
일본군 반격, 내부 갈등 등으로 영산에서 패퇴
최초 국내 진격…실패했지만 기억할 가치 충분
1907년 7월 일본은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8월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많은 대한제국 군인들은 저항하며 일본군과 싸웠다.
그 시가전 소식을 접한 한 청년이 조용히 망명을 떠났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터를 잡은 청년은 일본군 축출을 염원하며 2년간 사력을 다해 의병 투쟁을 전개한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안중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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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빈이 안중근 역으로 출연한 영화 '하얼빈'의 한 장면. [CJ ENM] |
영화 '하얼빈'의 주요 배경 중 하나는 안중근의 연해주 시기다. 하지만 영화를 다룬 기사들 중 그 시기 안중근 활동을 폭넓게 조명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이번 역사산책에서는 그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중근이 망명할 무렵 연해주는 국외 의병 운동의 중추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최고 지도자로 꼽히던 최재형과 조선 정부가 파견한 간도관리사로 활약했던 이범윤이다.
연해주 의병은 1908년 7월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친다. 최재형·이범윤 계열 의병을 합해 병력이 1000명 안팎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최재형 계열인 동의회 의병의 우영장(右營將)이라는 야전 지휘관으로서 한 부대를 이끌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연해주 의병이 국내 의병과 연합해 공동 항일 전선을 구축할 전략을 세웠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연합 대상이 함경도 삼수갑산 등지에서 활약한 홍범도 부대였다.
학계에서는 안중근이 이범윤 세력과 힘을 합쳐 두만강을 건넌 다음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국내 의병을 결집해 일본군을 몰아낼 구상을 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 과정에서 국내 의병에게 무기를 제공해 전체 의병 전력을 극대화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거사를 안중근과 함께 준비하는 우덕순의 얘기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우덕순은 1908년 국내 진공 작전에 참여했는데, 3000명 중 1000명 정도만 총을 가졌을 뿐이라는 홍범도 부대에 무기를 수송할 목적으로 출병했다고 훗날 증언한다.
이 무렵 홍범도 부대는 무기가 부족해 곤란한 처지였다. 총기는 물론 거의 바닥난 탄약을 구하기 위해 연해주 등지로 사람을 보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908년 6, 7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범도 부대 등 함경도 의병은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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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범도 부대는 연해주 의병의 구상에서 대표적인 연합 대상이었다. 사진은 2021년 10월 25일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순국 78주기 추모식 및 독립전쟁 청산리대첩 전승 101주년 기념식'에서 어린이들이 장군의 묘역을 살펴보는 모습. [뉴시스] |
이런 상황에서 연해주 의병이 무기를 홍범도 부대 등에 건넬 수 있었다면 의병 투쟁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국내 진공 작전 개시 초기 연해주 의병은 두만강과 잇닿은 국경 지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연파했다. 안중근 부대 등이 함경도 경흥의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거둔 승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안중근은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더해 내부 갈등에 직면하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갈등을 빚은 핵심 사안은 일본인 포로 처리 문제였다. 안중근이 만국공법을 근거로 포로를 풀어주자, 많은 의병이 반발해 대오에서 이탈했다.
얼마 후 연해주 의병은 함경도 내륙의 회령 영산에서 일본군에 참패한다. 국내 진공 후 최대 격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패하면서 연해주 의병은 홍범도 부대 활동 지역에 닿지 못한 채 연해주로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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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 의사가 순국 전 뤼순 감옥의 일본인 간수에게 써준 '獨立'(독립) 유묵. 지난해 10월 23일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5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공개됐다. [뉴시스] |
안중근은 의병 재건을 추진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일본의 항의를 받은 러시아의 단속 강화, 계파 간 분열 심화 등으로 연해주 의병의 기세는 이미 꺾인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 소식이 들려오고 안중근은 의병 투쟁과는 다른 방식의 항전을 위해 하얼빈으로 떠난다.
연해주 의병의 1908년 국내 진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 독립을 지향한 국외 한인 무장 세력이 전개한 최초의 국내 진공 작전이라는 점에서도, 국내 의병과 연합하는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얼빈' 흥행을 계기로 시민들이 연해주 등지에서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산화한 의병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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