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검정'의 세계를 보듬고 '하양'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차원의 시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시집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조금 더 밝은 세계로 나갈 터"
이곳에 살기 위하여 탁구를 칩니다. 주고, 받고, 받고, 주고, 단순하고 정직한 게 마음에 듭니다. …이제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마저도 끝장나 버린 이곳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아니 정확하게 미워하기 위해 시를 쓰고 탁구를 칩니다.
안현미 시인이 탁구 라켓을 들고 다섯 번째 시집을 펴냈다. 그가 받아 치는 탁구공 빛깔은 '하양'이다. 새 시집 표제도 '미래의 하양'(걷는사람)이다. 그동안 지나온 검정의 세계를 돌아보고 검은 우주에 떠 있는 작은 흰 점 같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시집이다. '탁구'로 문을 열고 '탁구장'으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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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시집을 펴낸 안현미 시인. 그는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는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그가 데리고 온 밤의 검정과 탁구공의 하양은 꽤 근사하게 어울렸다 주고받는다 받기 위해 준다 주기 위해 받는다 그것밖에 없다 그것밖에 없어서 즐겁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는다 _ '탁구' 부분
이생이 나에게 탁구공을 던졌다// 말복의 개처럼 진땀을 흘리는// 한낮의 탁구장 안에서// 언어도 기후도 위기인 팔월이었다 _ '탁구장' 부분
"탁구는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주고 받는 사람이 있어야 되죠. 나 혼자 나 자신을 파먹으면서 살아왔다면 미래에 나의 시는 다른 사람과 마주 보고 탁구를 치듯이, 나 혼자 스스로 책임지는 조그마한 삶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땀 흘리고 같이 웃고 때로는 승부욕에 불타듯, 작은 연대를 통해서 조금 밝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요."
시인의 생모 엄정자 여사는 올 초 향년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진작에 돌아가셨고 키워준 엄마마저 가신 지 오래이니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도 끝장난 셈이다. 아버지가 장성광업소 탄광에서 일할 때 엄마를 만나 시인을 낳았다. 시인은 엄마와 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열아홉 살 무렵에야 시인이 직접 생모를 찾아나섰는데 정작 엄마는 명랑했다. 후일 그네는 가슴속에 돌을 하나 심어 놓고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가슴을 치며 안부를 물었다고 털어놓았다. 장례식장에서는 울지 않았지만 이번 시집을 엄마에게 바쳤다.
1942916-2024211 //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의 딸 엄…헬레나…… 과부는 아니었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 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치면… 엄…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 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 엄…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니이껴… 어디 계시니이껴…… _ '엄헬레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시 쓰는 일에 매진해보려고 했던 과정이 담긴 시집입니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이 살았던 삶이 지금까지의 삶이라면, 이제 정말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오로지 시만 있는 어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펴내는 마지막 시집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계도를 정리하고 넘어가야지 좀 더 다른 차원의 시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가 생각하는 다른 차원의 시 세계는 어떤 것일까.
"제 시는 리얼리즘 시라고 볼 수 있고 미래파 시로 보이는 측면도 있어요. 때로는 사회적 발언도 하고 아니면 내적인 환상이나 이런 것들을 담았는데, 특별히 어떤 카테고리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있었죠.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의 경계에 있었던 것인데, 이 시집 이후에는 뭔가 초점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아니지만 나 자신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더 확대된 어떤 시적 세계를 가진 시인으로 갈 수 있는 게 뭘까, 이런 고민을 하는 계기라고 할까요."
이번 시집은 4부로 구성했다. '그것밖에 없어도 그러하듯이' '괴로워도 괴로웠다' '매달려 있다, 삶에' '이생이 나에게 탁구공을 던졌다'가 그것이다. 수록 시의 한 구절씩을 빌려와 지은 각 부의 표제이지만 이어놓고 보면 이것 또한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또하나의 시편이다. 1부는 상대적으로 문학적 성취가 높은 시편들을, 2부는 코로나시대와 현실의 암담함을, 3부는 가계도를, 4부에는 공간에 대한 상념을 대체로 담았다. 안현미는 상대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시편으로, 이제는 '그 불행도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그리움을 담은 '가정식 눈보라'를 꼽았다.
죽은 아버지가 또 죽는 악몽이 매일매일 새벽 배송되는 꿈에선 어떻게 깨야 하나요 나였던 나까지 부서진 마음은 어디서 자가 격리 하나요 드라이클리닝 한 죽음을 들고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드라이하게 말하는 어머닌 자주 좀 나타나세요 할 수만 있다면 그 불행도 다시 한 번 살아 보고 싶어요 그리운 불행 가정식 눈보라 창백한 푸른 점 칼 세이건과 Carl Sagan은 제겐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요 눈보라 눈보라 태양의 코로나 반대편을 향해 100억 광년을 날아가면 다시 한 번 그 불행을 살아 볼 수 있나요 그리운 불행 고독한 별 가정식 눈보라 모든 창백한 어머니와 푸른 아버지의_ '가정식 눈보라'
"아버지라는 존재가 나의 모든 슬픔과 분노의 원인인데, 어느날 죽음 쪽으로 넘어가 사라졌잖아요. 정확하게 미워하려면 대상이 었어야 되는데, 그게 없어진 거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열렬히 미워했던 존재의 부재 속에, 그 이면에 존재한 것이죠. 엄마도 막상 만나보니까 너무 명랑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인생 자체에서는 내가 미워해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거죠. 최선을 다해서 살았잖아요. 나에게 사랑은 미움의 반대가 아니라 미움의 다른 거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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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미는 '하양'에서 새로운 동력을 찾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죽은 새가 눈물을 물고 동쪽 바다로 날아가는 꿈을 꿨다// 울창한 구릉 속에서 흘러나온 암흑이 분지를 돌아나온 바람과 몸을 섞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사무치고 있었다// 더 이상 인간 가지고는 안 된다고 인간을 벗어 놓고 사랑마저 벗어 놓고 섬이 되고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죽은 새가 미래와 하양을 물고 돌아오고 있었다 _ '울릉도'
죽은 새가 미래와 하양을 물고 돌아오는 '울릉도'는 안현미의 시세계가 향후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갈지 선명하게 예고하는 시편이라 할 만하다. 이번 시집은 그 '미래의 하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은 무덤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무덤 위에 꼬부랑 노파의 정성을 담아 배롱나무 동쪽 가지를 꺾어 바쳤다. 시집을 탈탈 털면 배롱나무 붉은 꽃가루 날릴지 모른다.
태극과 궁극을 품은 미래의 빨강과 파랑과 하양 배롱나무 서쪽에 살던 노인의 약탕기를 생각한다 배롱나무의 동쪽 가지를 훔쳐 치성으로 약을 달이던 꼬부랑 할머니의 그 아득한 사랑의 설법을 기억한다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고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다 그 무덤에선 배롱나무 꽃가루가 나왔다고 한다 _ '초생활'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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