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많은 멸종위기 동물 천산갑 같은 게이 '그'와
그의 옆에서 겨우 편한 잠을 청하는 이성애자 '그녀'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긴밀한 우정과 애틋한 사랑
"자신의 각도로 이해 못한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잠자리 친구였다. 처음 만나자마자 같이 잤다. 처음 만난 날부터 아주 달콤한 잠을 잤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잠자리 기억이 너무나 감미로워서 머릿속에 거대한 사탕수수밭이 자랐다. …그녀는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그가 필요했다.'
'그녀'의 잠자리 친구는 어린시절 영화 촬영장 매트리스 위에서 만난 '그'였다. 매트리스 위에서 잠자는 아역 연기를 한 것인데, 실제로 그녀는 그와 함께 누웠을 때 달콤한 잠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연기한 영화가 프랑스 낭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그곳에 초청됐지만 아이들은 출발을 앞두고 가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해후한 그녀와 그는 다시 낭트를 향해 간다. 그 과정의 우여곡절이 최근 국내에 두번째 소개된 타이완 작가 천쓰홍(陳思宏) 장편 '67번째 천산갑'(김태성 옮김·민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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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초 장편 '귀신들의 땅'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된 타이완 작가 천쓰홍. 성소수자인 그가 새 장편을 들고 서울을 찾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소설 속 '그'는 작가 천쓰홍처럼 성소수자 캐릭터다. 그녀는 이성애자인데, 이들 헤테로와 게이의 애틋한 교류가 이 소설을 관류하는 고독이자 같은 방향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올초 국내에 처음 선보인 '귀신들의 땅'은 타이완의 근현대사와 그 역사를 흘러온 대가족의 에피소드를 곁들여 규모가 큰 스케일로 전세계 12개국에서 번역될 정도로 천쓰홍을 출세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번 장편은 작금의 타이완을 배경으로, 그와 그녀에 초점을 맞추어 성소수자 남성과 헤테로 여성의 이른바 '게이미(Gay蜜)'를 서정적이고 아련한 문체로 그려낸다.
중화권에서 통용되는 '게이미'라는 단어는 헤테로 여성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게이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천산갑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열대 지역에 분포하는 포유류 동물로 이번 소설에서 '그'의 캐릭터를 상징한다. 타이완 산에서 자주 발견되는 천산갑은 몸에 큰 비늘이 있는데 낮 동안에는 몸을 둥글게 만 채 잠을 자는 야행성으로, 비늘이 약재로 활용되고 고기도 찾는 이들이 많아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천쓰홍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외부에서 공격을 받으면 몸을 둥글게 만 채 소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이 동물 캐릭터를 '그'에게 투사했다.
"인터넷에는 기쁜 일을 겪으며 웃는 사진이 많이 올라오는데 우는 모습이나 슬퍼하는 모습은 잘 올리지 않더군요. 저는 눈물과 슬픔의 힘을 믿습니다. 타이완 독자들에게도 울고 싶으면 크게 울라고 독려를 합니다. 울음이라는 게 아주 중요하고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울고 싶으면 크게 우세요, 라고 말하는 소설입니다."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초청받아 서울에 온 천쓰홍은 "이 책은 실패자에 대한 소설"이라며 "대만 같은 경우에는 동성혼이 법제화됐기 때문에 좀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대도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울지라도 농촌과 같은 지역에서는 역시 성소수자들이 생존을 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말했다. 그는 "저는 실패한 작가이고 실패한 소설을 썼고, 이걸 실패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면서 "실패한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왜 우는지 알지 못했다. 울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보기만 하면 잠을 자고 싶어진다는 걸 알지 못했고,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기만 하면 울고 싶어진다는 걸 알지 못했다. 울고 싶은 건 대답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숨이 막혀 버린 말들이 눈물로 변형되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소수자의 슬픔을 말하는 소설이지만, 다수 헤테로 독자들에게는 인간들의 숙명적인 고독을 위무하는 힘을 발휘하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천쓰홍이 구사하는 문체의 힘이 크다. 울지만 왜 우는지 잘 알지 못했고, 자고 싶지만 왜 잠이 오는지 잘 알지 못하는 그와 그녀. 이 갈증을 적셔주는 건 '눈물로 변형되어 흘러내리는 말'이라는 대목은, 논리적인 언어로 해갈할 수 없는 육신과 정서의 상태를 적절하게 대변하는 표현인 셈이다.
이 소설과 달리 타이완 양대 문학상인 금장상과 금전상을 휩쓸고 글로벌 독자들을 확보한 그의 출세작 '귀신들의 땅'은 백색테러 시기에 살았던 가족의 이야기다. 천쓰홍은 "타이완에서는 백색테러 시기에 개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면서 "장발 규제는 물론 성별 구별은 엄청나게 강해서 그 당시 흘렸던 눈물과 웃음은 사실 모두 연출이고 진짜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억압받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낼 수가 없었고 시스템에 부합하는 형태로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귀신들의 땅'에 등장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은 귀신이 아닌 거죠. 이런 역사적 환경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고 귀신도 그냥 편하게 진짜 귀신처럼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신들의 땅' 영어판이 출간돼 미국에 가서 북토크를 할 때 그곳의 많은 독자들은 배경에 대해 이해를 잘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타이완과 비슷한 압제의 시기를 거쳐서인지 독자들이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의 타이완은 백색테러 시기가 끝나고 자유가 찾아와 동성혼이 법제화되었고 여성의 지위도 예전과 달리 높아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물론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도 많지만 지금 현재 타이완은 이전에 비해 훨씬 자유로워졌으며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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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쓰홍은 "소설이라는 건 충돌하는 예술"이라며 "힘이 있다면 부딪치며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이번 작품은 개인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개인들의 심리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비애를 많이 드러내려고 했죠. 사실 전작을 포함해 이 두 소설은 모두 '자유'에 관한 책인데, 자유롭지 못한 캐릭터들을 통해 오히려 자유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올 여름 자유로운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이전 베이징 올림픽의 권위적인 집단의 모습이 떠올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
소설 속 '그'는 천산갑을 닮았다. 그가 매번 사람들에게 포위될 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은 천산갑처럼 몸을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타이완에서 유럽에 보낸 천산갑은 야행성 동물이지만 시차를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일과 휴식이 타이베이 시간에 맞춰져 있는 양상이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시차를 조절하지 못하는 이 두 마리 천산갑이었다. 실제로 베를린에 살고 있는 천쓰홍은 라이프치히 동물원에서 이들을 접한 뒤 이 소설을 착안했다. 그와 그녀도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도달한 공간이 어디이든 시차에 적응하지 않는 천산갑처럼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타향이다.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 흩어진다. 깊은 감정과 가벼운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한순간의 환락을 추구할 뿐이다. 몸이 서로 만나면서 그날 밤 이후로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으리라는 굳은 약속이 있었다.'
이번 소설에서는 동성애의 구체적 행위도 생생하게 묘사하거니와,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한 번도 짜릿해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파리 뱅센 숲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남자들을 본 뒤 "왜 당신들만 이토록 짜릿하게 사는 거야"라면서 "우리는 짜릿할 수 없어서 당신들을 경시하고 차별하는 거"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생물학적 욕망이 전제되지 않아도 이성 간 온전한 사랑은 가능할까.
"타이완에서 동성혼이 법제화가 되기 전 제가 아는 게이와 레즈 커플이 혼인 관계에 있었는데, 이 둘의 신체적인 교류는 없었죠. 양쪽 부모의 압력 때문에 결혼을 한 건데, 혼인 뒤에는 출산 압력을 받았지만 이들은 아이 대신 고양이 12마리를 키우면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동성혼이 합법화된 후에도 이 둘은 다른 파트너를 찾을 생각이 없어요. 사랑이라는 건 각양각색인데 자기의 각도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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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인들의 몰상식으로 멸종위기에 놓인 천산갑. 천쓰홍은 부끄러움 많이 타는 이 동물을 소설 속 성소수자 캐릭터에 투사했다. [WWF] |
그와 그녀가 어린시절 찍었던 영화의 포스터에는 천산갑 66마리가 있었다. 그녀는 오래 갈망했으나 갈 수 없었던 낭트에 도착해 잠을 자면서 포스터 속에서 67번째 천산갑을 발견한 뒤 눈을 뜬다. 그녀의 '고독에 부식된 몸'에는 구멍들이 자욱했다. 작가의 말.
'더 써 내려 갈 수 없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누웠다. 천산갑을 세기 시작했다. …깨어보니 우리의 온몸에 천산갑이 뚫어놓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수없는 상처와 구멍.'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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