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사는 게 다, 사막에서 럭비 하는 거 아닌가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4-10-04 09:09:51
두 번째 소설집 '사막과 럭비' 펴낸 소설가 이경란
팍팍하고 불온한 일상 다양한 스타일로 담은 8편
중년 부부 건조한 관계 정곡 관통하는 서늘한 서사
이태준 단편 오마주하고, 순환하는 생의 숙명 담아

'남자에게는 적당한 말이 쉽게 떠올랐다. 같이 살까? 만날 때마다 묻는 말에는 어디서? 라고 받았고, 아바나 같은 데서, 라고 말하면 그러지 뭐, 라고 대답했다.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남자가 언제? 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시기를 언급하지 않은 이상 거짓말이 되지는 않을 거니까. …미래는 미래로 남아 있을 때만 아름다울 수 있음을 다정은 깨달았다.' 

 

▲두번째 소설집을 펴낸 이경란. 그는 "소설 쓰는 시간은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다정'은 모텔에서 가끔 만나는 남자가 '같이 살자'고 하는 말을 '어디서?'라고 형식적으로 받는다. 남자 또한 부담 없이 '아바나 같은 데서'라고 답하는데, 다정은 심상하게 여길 따름이다. 십중팔구 허언일 테지만, 미래를 기약하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녀는 남편 '준우'와 지속해 온 공허한 결혼 생활을 통해 관계의 허상을 뼈저리게 체득한 터이다.

다정은 준우가 내는 생활 소음에 진저리를 친다. '신문을 부스럭거리는 소리,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 소파 가죽이 맨살에 밀리는 소리, 코 고는 소리, 소리, 소리, 소리들…….' 그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먹는 소리였는데, '쩝쩝거리는 소리는 다정의 식도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다정은 소음들을 녹음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 녹음 파일 제목을 '아바나01,아바나02…' 로 바꾸어 남자의 메시지에 답한다.

이경란의 두 번째 소설집 '사막과 럭비'(강) 초두에 배치한 이 단편 '다정 모를 세계'는 삭막하다. 준우는 살아가면서 오래 끓인 장어 소스처럼 칙칙해져 갔고, 미움보다 지독한 무관심의 대상으로 피차 전락했다. '결혼 생활은 2인극이 아닌 1인극이었고 다정이 배우라면 준우는 관객이었다. 준우의 1인극에 다정은 관객으로 입장하지도 못했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 단편을 포함해 8편이 수록됐거니와, 단편들 제목에서 표제를 뽑지 않았다. 사막에서 럭비를 하는 듯 한 팍팍한 정서를 두 단어로 조합해냈다.

"사는 게 다 사막에서 럭비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사막에 떨어트리면 아무 데로도 못 튈 거 아니에요? 이번 소설들은 여성 서술자로만 썼어요. 그게 저 자신에 조금 가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소설들에는 제가 조금씩 더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요. 다 제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정서 같은 게 제 것 같아요."


사막에서 럭비를 한다는 건 암담한 상황을 상징하는 셈인데, 이경란은 실제로 자신의 정서가 이러한 바탕이었을 때 쓴 단편들이 포진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크리놀린'은 사막에 구속된 럭비공 신세를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하는 공간과 어투인데, 실제로 희곡 형식으로도 써 본 작품이라고 했다. 크리놀린이란 스커트를 부풀게 하기 위해 딱딱한 재질로 만든 속치마로, 이경란의 단편에서는 여성 화자의 구속 상태를 상징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이 여성은 크리놀린을 벗어던지고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이름을 찾아 주체적으로 나아간다. 

"많은 중년 부부들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그거를 별거 아니게 생각하고 여성들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능력과 용기가 부족한 거죠. 처음에 '크리놀린'을 썼을 때는 엔딩이 비참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스스로 그 상황을 극복했고 결말도 달라졌어요. 같은 이야기를 다른 소설로 완성시키려면 뭔가 많이 달라야 되는데, 그럴 때는 스타일을 다르게 해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싶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본 거죠." 

세상은 여전히 칙칙하고 사막 빛깔인데, '마을 밖에는 꽃과 노래'에 이르면 희미하게나마 생을 수용하는 평안이 느껴진다. 공간과 인물은 설화적이다. 마을 바깥에 대숲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면 사막이다. 그 경계의 대숲 언저리 외딴집에 늙은 남자와 여자 아이가 산다. 아이는 가끔 대숲에 들러 꽃이 피었나 살피고, 백년에 한 번 피는 대꽃이 보이면 노인은 죽을 운명이다. 대숲에서 꺾어온 대나무를 집 앞에 꽂고 옷자락을 찢어 묶었더니 마을 사람들이 아이에게 와서 미래를 묻는다. 그 경계에서 노인은 죽어가고, 아이는 아이를 낳고, 높지도 낮지도 흐리지도 맑지도 않게, 그렇게 생은 흘러간다. 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가만히 느껴보렴 가만히 들어보렴/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저 소리/ 저 바람은 가지 끝에 가지는 바람 끝에/ 시작은 끝이고 끝은 시작이란다/ 두 눈을 들어보렴 두 귀를 열어보렴/ 봉우리에 걸린 구름 태양을 가리고/ 나던 모든 것들 흩어져 사라졌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끝이란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끝'이라는 순환의 이미지를 서사시에 방불하는 문체로 형상화한 단편이다. 애당초 노래 가사 청탁을 받아 써놓은 것을 소설에 녹여냈다고 했다. '성북동의 달 없는 밤'은 상허(尙虛) 이태준(1904~1978)의 단편 '달밤'과 '아련'의 등장인물과 사연을 모티브로 꾸려낸 단편이다.

'달밤'의 모자란 남자 황수건의 처가 동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가출한 뒤 '아련'을 낳고 이태준으로 짐작되는 주인댁에 업둥이로 들여보낸 딸 주변을 맴도는 이야기로 설정했거니와, 이 여성화자는 그 집에 붙박인 정령으로 등장한다. 소설가 김남일이 주도하는 '아시아 근·현대 작품을 읽는 모임'에서 한국 근대 작가를 중심 인물로 소설을 써서 책으로 내자는 제안이 있었고, 그가 성실하게 수행한 과제가 이 단편이었다. 당대의 어투를 활용한 유려한 문체와 발상이 흥미롭다.

"제 입장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써보는 게 일단 재미있어요. 똑같은 방식으로 쓰는 건 지겨운데, 지겹다는 거는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거고, 지난 작품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그냥 고만고만한, 이건지 저건지 읽고 나면 헷갈려서 기억도 못하는 이런 작품들만 계속 쓰는 건 재미가 없어요. 소설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첫 번째가 제가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하거든요."

 

'여행시절(旅行時節)'은 애틋하다. 험난한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온기가 흐르는 건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청춘의 에너지 덕분일 터이다. 타이완에서 유학 온 럭비 선수가 등장한다.

 

▲이경란은 "쓸 수 있는 만큼 썼다"면서 "언젠가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라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그해 11월,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길었던 내 나라의 계엄이 해제된 일이 그날과, 그날의 죽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여름 해가 뉘엿해지려면 한참 남았던 시각에, 운동장에서 돌을 나르던 행렬도 잦아든 그때, 구석에 아직 남아 있던 죽영에게로 갔다. 죽영의 얼굴은 땀과 눈물과 두려움과 피곤으로 엉망이었다. 집에 가자. 죽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왜 집이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을까. 기숙사로 가자.'

덩치가 산만한 그 친구와 이한열이 사망한 시위 국면에서 '주경'이 손을 잡고 뛰었던 추억이, 그가 후일 누군가에게 들려주었을 법한 애틋한 이야기가 되어 타이완 작가의 소설로 등장하는 맥락이다. 지나간 시절의 '럭비'는 어디로든 튈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이었다. 이밖에도 '해(害)'와 '다섯 개의 예각'은 팍팍한 생의 불온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맥락의 결이고, '못 한 일'은 이전 세대 피복 노동자의 삶을 담았다.

이경란은 다음 장편으로 여성 노동자 3대 이야기를 집필하는 중이다. 이즈음에는 소설 쓰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다른 일을 시간 나는 대로 해야 하는데, 육체노동을 하면서 다른 일에서 느끼기 어려운 개운함을 맛보게 되었다고 했다. 정직하게 근육을 움직이는 일은 인간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준다고 덧붙였다. 그가 보내온 추신.

-주변 탓을 하고, 제게 있는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시간이 길었어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문제들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럴 용기도 조금씩 생겼던 것 같아요. 소설 쓰는 시간이 저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여러 모로 늦되는 사람인가 봅니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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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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