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기온을 확인하지 않고 봄옷을 입고 나온 게 잘못이었다. 그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엔 멀리 와버렸다. 뚝섬역에서 내리면서 이런 후회가 밀려왔다. 뚝섬역 8번 출구에서 왕십리로로 걸었다. 길을 꺾자마자 작은 빵 가게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빵집 밀도. 일단 맨 뒤에 가서 줄을 섰다. 30여 분 기다렸을까. 드디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비좁았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익숙하게 빵 이름을 말하며 주문을 했다. 나는 그 빵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식빵을 샀다.

서울숲역 방향으로 걷다 보니 건너편에 특이한 컨테이너들이 보였다. ‘언더스텐드 애비뉴’라고 적혀 있다. 컨테이너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건물을 만들고, 그것들을 늘어놓아 거리를 만들었다. 잡지에서 본 것도 같았다. 가구를 파는 가게부터 들어갔다. 전시된 소파가 예뻐서였지만 그보다는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많이 불었다. 봄눈이라도 내릴 것만 같은 날씨였다. 바로 옆 화원도 카페도 옷가게도 문구 가게도 차례대로 들어갔다. 마지막에 들른 구두 가게에서는 뚝섬과 성수동 일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을 구두 디자이너라고 소개한 구두 가게 사장은 창업한 지 1년쯤 됐다고 했다. 성수동 일대에는 아직도 구두를 만드는 공장을 비롯해 가죽 원단이나 구두 굽 등 부자재를 파는 500여 개의 가게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 구두 공장 앞을 지나도 그곳이 공장이란 걸 알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성수동에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특이한 카페와 개성 있는 식당 때문이란다. 구두 부자재 거리, 카페 거리, 갈비 골목 등을 지도에 표시해 주면서 꼭 구경해야 할 카페 이름도 적어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잠시 잊고 있었던 봄바람이 몰려왔다. 왕십리로를 따라 한강까지 걷다가 ‘대림창고’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죽 거리 취재해야지. 머릿속으로 이런 동선을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다시 뚝섬역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뚝섬(纛島)은 섬이 아니다. 한강이 범람하면 성수동 일대가 물에 잠겨서 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섬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둑도’, ‘뚝도(纛島)’. ‘독도(纛島)’ 혹은 ‘살곶이벌’이라 불렸다. 이 일대가 왕의 사냥터로 자주 이용되던 조선시대에 왕의 상징인 독기(纛旗)가 벌판에 꽂혀 있었던 데에서 독도(纛島)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주변 경치가 좋아서 일제강점기에는 유원지로 이용되었고, 1950년대 이후에는 경마장, 골프장 등으로 조성되었다. 1980년대 초 한강 종합개발사업을 할 때 물길을 바로 잡고 제방을 쌓아 온전한 육지가 되었다. 이후 골프장은 폐업하고 경마장은 과천으로 이전했다. 지금의 서울숲은 2005년에 만들어졌다.
메모가 있는 지도를 들고 서울숲2길 골목을 디귿 모양으로 훑으며 걸었다. 다세대주택 사이사이에 주택을 고쳐서 만든 카페들이 있었다. 한 카페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기하는 줄이 30m쯤 됐다. 카페 안에 뭐가 있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네모난 대나무 쟁반에 케이크와 차가 담겨서 나오는데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단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단다. 요즘 핫하다는 곳은 대부분 ‘사진’과 연결된다. 그럴듯한 사진이 나오는 곳이 뜬다. 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새롭고 신기한 것을 보면 나이를 불문하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부터 찍지 않는가.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장미맨숀’을 발견했다. 구두 가게 사장이 적어준 카페 목록에 있었던 곳이다. 빈티지한 외벽에 촌스러운 서체로 ‘장미맨숀’ 간판이 붙어 있다. 그것도 ‘맨션’이 아니라 ‘맨숀’이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고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주택을 개조한 ‘장미맨숀’엔 방들이 있다. 빈티지한 건물에 클래식한 가구를 배치하고 화분을 놓고 샹들리에를 달았다.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겨울옷을 입고 나온 사람은 여유로웠지만, 나처럼 봄옷을 입고 나온 사람들은 추운 기색이 역력했다. 휴일 오후, 뚝섬과 성수동은 데이트족이 단연 많았다.

다시 서울숲2길을 걷다가 성수중학교 정문에서 뚝섬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햇볕이 잠깐 나왔다가 다시 흐려졌다. 작은 서점이 보였다. ‘낫저스트북스’. 화원을 하는 친구가 한쪽 공간을 내어주어 서점을 열게 되었다고 했다. 식물과 책. 괜찮은 조합입니다. 서점엔 독립출판물이 많았다. 해방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출판 책에 빠졌던 기억이 새로웠다. 표지에 간단한 책 설명은 선택에 좋은 기준이 될 것 같았다. ‘블라인드 필사노트’라는 노란 봉투가 신기해서 유심히 봤다. 필사하기 좋은 헌 책 1권, 소소문구 공책, 신문지 연필이 들어있다고 적혀 있다. 안에 어떤 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봉투 밖에 적힌 키워드를 보고 필사 봉투를 골라야 한다. 블라인드 필사 노트라니. 어쩌면 그냥 버려질지도 모를 책이 필사(筆寫)의 문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다음 주 본격적인 성수동 산책을 기약하며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손에는 여전히 산책길에 샀던 식빵이 들려 있었다.
강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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