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아전' 기록…생몰 연대 등 알려진 사항 적어
단종 죽자 위험 무릅쓰고 장례 치른 다음 은거
단종 복권 후 사육신급 포상 받아…시호 '충의'
지난 4일 상영이 시작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개봉 5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어섰다.
왕위를 잃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16세의 단종(박지훈 분)이 1457년(세조 3년)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의 한 마을에서 보내는 생의 마지막 넉 달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서 마을의 중심인물로 그려진 엄흥도(유해진 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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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오른쪽, 유해진 분)와 단종(박지훈 분). [쇼박스] |
엄흥도는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긴 단종이 결국 목숨마저 뺏기자 그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자신은 물론 일가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단종의 장례까지 치른 후 영월을 떠나 숨어 산 것으로 전해진다.
엄흥도에 대해 알려진 사항은 많지 않다. 관련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월 엄씨 족보에는 1404년(태종 4년) 출생으로 기록돼 있지만, 엄흥도가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한 국가 공식 기록은 없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묘가 어디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명확한 것은 엄흥도가 양반 출신 관료가 아니라 영월 현지의 호장(戶長) 즉 아전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전기에 호장은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을 보좌하는 아전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엄흥도는 단종 사후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년) 부분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에 아전이었다고 명확히 나온다. 중종의 명으로 노산군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낸 관리가 왕에게 '당시 고을 아전 엄흥도라는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춰 단종의 장사를 지냈다고 현지 사람들이 말한다'고 보고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설정한 것처럼 단종과 엄흥도는 실제로 가까운 사이였을까?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다는 얘기는 국가 공식 기록인 실록이 아니라 1817년(순조 17년) 엄흥도 후손들이 초간한(1937년 누락된 내용을 추가해 다시 간행) '충의공엄선생실기'(이하 '실기') 같은 민간 기록에 나온다.
'실기'에서는 "항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다가 처형된 사육신을 꿈에서 만난 단종이 깨어나 통곡했고, 엄흥도가 그 소리를 듣고 단종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이 매일 만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알려져 있는 엄흥도와 단종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실기'를 근거로 한다. 그만큼 엄흥도와 관련해 비중 있고 소중한 자료다. 그러나 다른 사료와 교차 검토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고 보기 어려운 '전해 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수록된 점, 단종 사후 360년이 지나서 후손들이 간행한 책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실기' 간행은 단종과 그 주변 인물들이 복권되면서 엄흥도는 물론 후손들도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세상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복권 논의와 작업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가장 먼저 복권된 사람은 단종을 낳고 사흘 후 세상을 떠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였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된 1457년 서인 즉 평민으로 강봉됐던 현덕왕후에게 1513년(중종 8년) 왕후 지위가 다시 부여됐다.
다음은 사육신 차례였다. 1691년(숙종 17년) 숙종은 사육신을 복권시켰다. 1698년(숙종 24년)에는 단종 복위를 결정했다. 단종 사후 241년 만이었다.
이어 엄흥도를 기리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는 군역 면제 등 엄흥도 후손들에 대한 실질적 혜택 부여를 수반했다.
단종이 복위된 1698년 숙종은 엄흥도에게 공조좌랑(정6품)이라는 벼슬을 추증(사람이 죽은 뒤에 살아 있을 때의 공로나 사정을 고려해 벼슬이나 직위를 주는 것)했다. 영조(재위 1724~1776년) 때에는 엄흥도의 벼슬을 먼저 공조참의(정3품)로, 뒤이어 지금의 차관에 해당하는 공조참판(종2품)으로 높였다. 또한 사육신 위패를 모신 사당인 영월 창절사에 엄흥도 위패도 모시게 했다.
위패는 함께 모셨지만 조정은 사육신과 엄흥도 포상에 차등을 뒀다. 엄흥도에게는 사육신에게 내린 것보다 낮은 벼슬을 내렸고, 시호는 사육신에게만 내렸다. 이상균 강릉원주대 조교수의 2021년 논문('朝鮮末 嚴興道의 顯彰과 후손의 宗統是非')에 따르면, 조정에서 엄흥도의 충절이 사육신에 비견된다고 평가하면서도 신분이 낮은 아전 출신임을 고려한 결과였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엄흥도 후손들과 각지 유생들은 엄흥도에게 사육신과 같은 포상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요청했다. 신분을 이유로 충절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조정은 요청을 받아들였다. 1833년(순조 33년) 엄흥도 벼슬을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공조판서(정2품)로 높였고, 1876년(고종 13년)에는 엄흥도에게 '충의'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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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유해진 분). [쇼박스] |
엄흥도 후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후손 중 경북 예천에 살던 이들이 1900년(광무 4년) 엄흥도에게 불천위(不遷位) 은전을 베풀어달라고 고종에게 청했다.
불천위는 나라에 공을 세웠거나 덕망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에서 허가한 신위(神位)를 말한다. 불천위로 공인되면 큰 영광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고종은 요청을 받아들여 불천위로 공인했다.
이는 엄흥도 후손 간의 종가(宗家) 혈통 경쟁과 다툼으로 이어졌다. 예천 후손들의 불천위 요청을 수용했다는 것은 '엄흥도 제사를 모시는 종가는 예천 후손 쪽'이라고 조정에서 공인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울산에 살던 엄흥도 후손들은 1902년 '예천 쪽에서 종가 혈통을 가로챘다'며 조정에 소장(訴狀)을 제출했다. 이듬해에는 경남 유생들이 예천 쪽 후손 징계를 청원했다. 1903년 조정은 울산 후손 쪽을 종가로 인정하고 엄흥도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엄흥도는 충절의 표상이자 영월의 주요 역사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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