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좋아, 그런데 사귀는 건 모르겠어."
연인 관계로 발전 중이라 여겼던 상대가 이렇게 말한다면, 웬 날벼락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도 '비겁한 핑계'라며, 그런 만남이라면 '이어갈 이유가 없다'며 만류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연애를 계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같은 말에는 감정을 조금 뒤로 하고 연애 관계를 형성해도 괜찮을지를 먼저 생각한 뒤 연애를 시작하는 고급 기술이 담겨 있다.
상대방 혹은 사회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지는 연애를 하고 있다면, 동등한 계약의 주체로서 건강하게 연애하는 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침 그걸 콕 찝어 가르쳐주는 지침서가 출간됐다. 연애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직면하는 숱한 상황들을 계약에 비유, 더 안전하고 행복한 연애를 돕는 <연애도 계약이다> 저자 박수빈 변호사를 UPI뉴스가 만났다.
ㅡ연애를 계약과 연관 지은 이유가 있다면
보통 연애 서적들은 '여자는 이럴 때 이렇게 해' 혹은 '남자는 이럴 때 이렇게 해'라는 정형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해버려라'라는 식으로 조언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개인의 고유성과 인격이 간과되는 측면이 많다. 계약의 기본원칙은 갑과 을이라는 주체가 대등한 관계에서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갑을이라고 하면 '갑질'할 때의 갑을 떠올리기 쉬운데, A, B처럼 부르는 호칭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을 연애에 접목하면 "연애는 권력 관계다", "로맨스에 휩쓸려서 해야 한다" 등의 그릇된 통념을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ㅡ연애에서 계약이 갖는 의미란
기본적으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1번이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2번이다. 두 가지를 전제로 놓고 교섭을 하면서 양보할 수 있는 것과 더 주장해야 하는 것을 소통하는 과정, 그리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연애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연애도 하나의 계약이라고 볼 때 계약은 일방적 의무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체결할 수도 있고 체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계약이다. 사람이 특정한 나이가 되면 무조건 연애를 하고, 결혼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이니까 하고 싶은지 처음부터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ㅡ'썸'타는 단계를 교섭 단계에 비유했는데
요새 썸(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호감이 있는 상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관심이 높은 것 같다. 연애는 한번 시작하면 무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좋은 연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부터 좋은 상대방을 고르면 고민을 줄일 수 있다. 썸은 누구랑 연애할지를 훑어보는 단계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좋은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교섭을 잘해야 하듯이 내가 원하는 상대를 정확히 알고,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첫눈에 반하거나, 일시적 감정에 휩쓸려 연애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유머 코드가 안 맞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폭력적 성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상대방이 한눈에 보여주지 않는 것들이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섭 단계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동등한 계약 당사자로 여기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 헤어진 이후의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등은 사실 상대방이 나를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이나 물건으로 여기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기 전에 상대가 나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하는 사람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ㅡ연애는 물권이 아니라 채권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물권법은 물건에 대한 권리를 적시한 법이다. 어떤 물건을 사면 완전히 내 것이 된다. 완전히 독점적으로 물건을 사용하고 버리고 폐기하고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채권은 사람과 사람 관계다. 권리와 의무가 있고 그것을 서로 이행해주는 관계다. 대표적인 물권적 태도의 예시는 결혼하기로 한 사위가 장인을 찾아가서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혼 당사자는 딸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저희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가부장제에서는 마치 결혼의 계약 당사자가 사위와 장인처럼 돼 있다. 연애 상대방이 내 교섭 상대라고 인정하는 것이 채권적인 관점이다.

ㅡ나를 동등한 주체로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술을 마실 때 소리를 지른다든지 화나면 물건을 던진다든지 사소한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보통은 취했으니까 실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취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것을 용인하는 것이 맞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런 행동을 상대방에게 말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혹시 이야기했을 때 '저 사람이 나한테 화를 내면 어떡하지'라고 생각이 든다면 소통이 안 되는 관계인 것이다. 소통이 가능한지, 그리고 얘기했을 때 상대의 반응이 폭력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비단 내 얘기를 그냥 잘 들어주거나 말할 때 입을 다무는 게 소통이 아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다. 연인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또 내가 나에 대해서 타인이 행하는 폭력의 역치(閾値)를 낮출 필요가 있다. 용인할 수 있는 기준이 없으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누구도 나한테 폭력을 행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자존감을 높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ㅡ'연애 계약서'를 실제로 쓴다고 가정하면
이 책이 계약서를 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웃음). 계약서는 정해진 형식과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계약은 맺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폭행이나 폭언을 하면 헤어진다", "헤어진 이후에는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만나자고 종용하지 않는다", "성관계 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 "연애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은 제삼자와 데이트하지 않는다" 같은 소소한 약속들을 포함할 수 있겠다.

ㅡ연애를 잘 유지하는 비결이 있을까
연애는 지속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깨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이런 것들을 약속했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이행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할 때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헤어져야 하지만, 조율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유연한 계약을 체결할수록 장기적으로 연애가 잘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ㅡ결국 '내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가
맞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아는 것, 내가 원하는 것에 상대방이 부합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적인 공간에서까지 남한테 무조건 맞추거나 자발성을 잃는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적어도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더 안전하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접근해야 한다.
KPI뉴스 / 글 강혜영·영상 권라영 기자kh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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