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좋은 토요일 오후 1시, 겸재정선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지난 번 가양동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주 우물 은행나무가 겸재의 그림에 나온다는 표지판 설명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재정선미술관’은 양천로에서 양천로47길로 들어서야 찾을 수 있다. 골목 안쪽 궁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1층 전시실은 기획전시실이고, 2층이 상설전시실로 겸재 정선의 그림을 그의 삶과 엮어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의 변화를 시기별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정선의 성년기였던 18세기 초엽은 변화의 시기였다. 명(明)에서 도입된 절파(浙派)가 쇠퇴하고 남종 문인화가 유행하던 때였다. 진한 먹을 사용해서 흑백의 대비와 거친 표현이 특징인 절파의 그림보다 인간의 내면을 그림에 투영하는 문인화가 주류를 이뤘다. 정선은 남종화의 계보를 이으면서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열었다. 그때까지 중국에서 전해오는 상상에 의한 산수화를 그렸다면 정선에 와서 비로소 우리나라 경치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진경산수화가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경치를 마음에 드는 대로 커트해서 그리는 그림이다. 정선은 이런 그림을 구현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의 소재를 구했다고 한다.
정선은 65세부터 만 5년간 양천현령으로 재직했다. 이때 양천현아를 중심으로 주변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 그림 중에서 가양동 성주 우물 은행나무가 있는 그림 세 점을 발견했다. <종해청조(宗海聽潮)>의 홍살문 너머에 초가와 기와집 뒤 작은 등성이에 성주우물 은행나무가 심겨진 언덕이 있었다. <빙천부신(氷遷負薪)>에서는 왼쪽 언덕 짙푸른 소나무 옆에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가 은행나무이다. <소악루(小岳樓)>에는 짙은 소나무 옆에 잎이 무성한 나무로 서 있다. 막상 280여 년 전 그림 속에서 성주우물 은행나무를 확인하니 예사로운 나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 3층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궁산근린공원 입구이다. 겨울 햇볕을 즐기러 나온 강아지 두 마리를 만났다.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노부부도 만났다. 어떤 어르신은 뒷걸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다.
궁산은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낮은 산이다. 주택가 바로 뒤에 있고 큰 길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산으로 들어갈수록 새소리가 선명하다. 새소리에 집중해서 걷는데 갈래 길이 나타났다. 궁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을 선택했다. 소악루에 올라 한강을 한번 굽어 볼 생각이었다. 양천현령 시절 정선의 그림은 한강이 주요 배경이다. 관아에서 한강의 조류 소리를 듣는 그림, 눈 덮인 산과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배경으로 나뭇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 그림 등이 그것이다. 당시 문장가들과 시와 그림을 주고 받으며 교류했던 중심에 소악루가 있었다.

소악루에 오르니 멀리 북한산과 남산이, 강 바로 건너편엔 상암 디지털 미디어 단지가 보인다. 소악루 앞에서 정선의 그림 하나를 또 만났다. <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라는 제목이다. 왼쪽 아래에 소악루가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탑산, 두미암, 선유봉이 있고, 멀리 목멱산과 금성산, 와우산은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 육중한 바위절벽 잠두봉(절두산)이 있는 그림이다. 소악루에 앉아 시라도 한 수 읊고 내려가야 할 분위기이다.
일부러 먼 길을 택해 산을 내려온다. 뒤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계속 따라온다. 가끔 뒤돌아보지만 눈에 띄는 새는 없다. 간혹 풀숲에서 산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산비둘기가 튀어오른 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추니 발 아래서 새들이 짹짹거린다. 마른 잔가지 사이에 참새 새끼들이 점점이 흩어져 먹이를 찾는지 분주하다. 얼핏 헤아려봐도 50여 마리는 넘는다. 잎이 다 진 겨울산은 작은 움직임도 요란하게 느껴진다.
‘궁산 둘레길’ 이정표를 보고 내려오는데 양천향교 뒷길이다. 올라갈 때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가던 부부를 다시 만났다. 양천향교는 문이 닫혀 있었다. 담 너머로 보이는 지붕엔 비닐이 덮혀 있다. 공사 중인 모양이었다.
전철역 방향으로 골목을 걷는데 30년째 전통방식으로 국수를 만드는 집 간판이 보인다. 옆에는 큰 절도 있다. 산책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풍경들이다. 옛고을 협동조합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갔더니 고추장과 조청을 팔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물세트로 주문이 많이 들어와서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 겸재 정선 미술관과 소악루를 보고 온다고 말하자 마을 자랑이 시작되었다. 옛날 양천관아가 있었던 곳이니 조선시대부터 한강 이남의 중심지였단다. 직접 만들었다는 조청을 한 숟가락 받아먹었다. 은근한 단맛이다. 겸재의 수묵화처럼 전부 드러내지 않았지만 꽉 찬 단맛이다. 갑자기 쫄깃한 인절미가 생각났고 허기가 밀려왔다.
이 글은 양천향교 근처에 있는 ‘더 착한 커피’에서 쓰고 있다.
KPI뉴스 / 강진 소설가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