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자신들만의 봄을 강요하는 계엄령의 실체"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5-03-14 17:23:55
여전히 유효한 알베르 카뮈의 희곡 '계엄령' 새롭게 출간
부조리와 허무에 허물어지지 않는 반항하는 인물 내세워
자신들에 유리한 법과 요설로 독재 정당화하는 현실 극복
좌우 이념 막론하고 어느 체제에서나 가능한 독재의 위험

'사람마다 생각하는 봄이 다른 법. 나에게 있어서 봄은 쇠로 된 장미가 피는 계절이야. 다들 쇳물을 만들 불을 지펴라. 그 불은 환희의 불이다. 위병들!'
 

▲ 부조리 철학과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그가 들고 있는 신문의 제호 'EN AVANT!'는 프랑스어로 '전진!'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무의미를 직시하되 반항하며 의미를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상징하는 듯하다. [녹색광선 제공]

 

생명과 희망의 봄을 자신들만의 어두운 봄으로 분탕질하는 세력이 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봄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봄이 지닌 기본적인 속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쇠로 된 장미'란 억압과 통제된 질서의 상징이거니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생명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조작된 삶을 강요하는 질서를 의미한다. 그 조작된 생명을 만들 불을 지피라니, 독재자에게는 환희의 불일지 모르나, 생명의 봄을 품는 이들에게는 저주의 화염일 수밖에 없다.

1948년 초연된 알베르 카뮈(1913~1960)의 희곡 '계엄령'은 당대의 정치적 억압과 전체주의의 위험을 강렬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출판사 '녹색광선'에서 안건우의 번역으로 새롭게 출간한 '계엄령'의 독재자는 자신만의 봄을 강요하며 폭력적인 체제를 정당화한다. 세상에 나온 지 7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되풀이되는 '계엄령'을 감안하면 여전히 유효한 신간인 셈이다.

카뮈가 소설 '페스트'로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한 이래 그에게 거는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높았는데, 후속작으로 나온 작품이 이 희곡이다. 이 작품에서는 '페스트'가 독재자로 등장한다. 소설이 현실적이고 서사적인 반면, '계엄령'은 상징적이고 연극적이다. 계엄령을 발동한 독재자 페스트에 저항하는 인물 '디에고'와 그의 연인 '빅토리아'가 등장하고, 페스트의 '비서'와 허무주의에 함몰된 '나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스페인어로 '없음'을 뜻하는'나다'는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고 저항보다는 포기를 선택하는 냉소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만, 나는 신을 부정한다"면서 "이 세상 유일하게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허무 만세!"를 외친다. 나다가 보는 계엄령의 세상은 절망적이다.

'서서 죽느니 무릎 꿇으며 사는 걸 택하리. 세계는 고요한 죽음과 이제부터 명령에 충실할 개미떼들이 함께 공유하는 교수대의 직각으로 이루어진 질서를 찾을 것이야. …커다란 날개를 단 경찰 천사들이 날아다니네. 허무여 영원하리!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다' 같은 카뮈의 인물은 대낮에 무의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이방인'에 먼저 등장했다. '계엄령'은 카뮈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적시한 이른바 '부정'의 세계를 다룬 작품들에서 벗어나 '긍정'의 세계를 표방한 작품이다. '정의의 사람들' '반항하는 인간'과 함께 세상의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반항하며 의미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긍정'의 3부작에 해당한다. '계엄령'에서 '나다'를 극복하는 저항의 상징이 '디에고'라는 청년이다. '페스트'가 포고령을 발동하자 디에고는 빅토리아의 집으로 숨는데, 판사인 연인의 아버지가 법을 내세워 그를 내치려 한다.  

판사는 "나는 법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며 "너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소리친다. 그 법이 범죄를 가리키는 것이라도 지킬 것이냐고 묻자, 판사는 "범죄가 법이 된다면 그건 더이상 범죄가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상황이다. 히틀러, 스탈린, 프랑코 등의 독재 정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 이를 정당화한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는 현재진행형 현실이기도 하다. 디에고를 앞에 두고 '페스트'는 말한다.

'너희들의 소박한 기쁨 따위는 질색이야, 배불리 살 처지도 못 되면서 뻔뻔하게 자유를 요구하는 이 나라를 생각하면 신물이 난다고. 내 손은 감옥도, 사형집행인들도, 권력도, 피도 모조리 쥐고 있어! 이 도시는 곧 파괴될 것이다. 그 잔해 위에 건설된, 완벽한 사회가 아름답게 침묵하는 동안 마침내 도시의 역사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모두 짓밟아 죽여 버릴 거야.'

독재자의 포효에 디에고가 말한다.

'누가 절망을 말하는 겁니까? 절망은 재갈입니다. 포위당한 이 도시의 침묵을 깨는 것은 바로 행복의 번갯불, 희망의 천둥소리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유일한 자산, 이것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형제여, 우리는 모두 이 재갈을 벗어던지겠소! 아! 메마른 대지 위에, 더위로 갈라진 틈 사이로 처음으로 빗물이 스며드는구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이 득세하면서 유럽에 냉전 기류가 형성될 무렵 공산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뮈가 '계엄령'의 무대를 공산 체제로 상정하지 않고, 스페인 내전에서 이긴 '프랑코' 정권 아래의 카디즈를 무대로 집필한 것과 관련해 비난이 드셌다.

역자 안건우는 해설에서 "카뮈는 우리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증언하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작가가 지녀야 할 사명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은유를 노정하는 극의 배경이 동구권이 아니라며 문제 삼는 (비평가) 마르셀의 지적은, 몇 해 전 이웃이 겪었고 현재 진행 중인 전체주의의 비극에 대해 프랑스가 취하는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눈 감으면서도 이념적 대립에 매몰된 협소한 시각"이라고 썼다. 카뮈는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어느 체제에서나 가능한, '계엄령'으로 상징되는 독재의 위험성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독재자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는 법, 그것이 이 세상의 정의"라고 말하자, 디에고는 "그따위 정의에 동조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고 응수한다. 독재자가 "이 세상의 질서를 바꾸고 싶다면, 꿈 따위는 내다 버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을 고려하라"고 회유하자 디에고는 거부하며 말한다.

'살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도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따위 논리가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이지! 지난 수백 년간 너와 같은 권력자들은 이 세상에 난 상처를 치료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악화시키기 일쑤였어. 그리고 그런 방식을 대단한 것인 양 치켜세웠지, 왜냐면 아무도 그들의 면전에 대고 코웃음 친 적이 없었으니까!'

 

▲ '계엄령'의 기획자인 장루이 바로(왼쪽)와 알베르 카뮈(1948). 당시 평론가 마르셀은 초현실주의자인 바로에게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워 '계엄령'의 진실을 왜곡했다. [녹색광선 제공]

 

안건우는 "자유와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것은 대단한 품성이나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당장이 아니라도 그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와 용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고 썼다. 그는 "오랜 잠을 깨고 부활을 시도한 망령을 완전히 말소시키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거리와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면서 "내가 가진 능력으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이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서둘러 작업하려고 애썼다"고 밝혔다.

냉소적인 허무주의자 '나다'는 푹풍처럼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바다로 몸을 던지기 전 말한다. '잘 있거라, 선량한 그대들이여, 언젠가 그대들도 알게 될 거야.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신의 얼굴이 소름 끼치는 모습이라는 걸 알아 버린 상태에서는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카뮈가 부조리에 함몰된 '부정'의 캐릭터를 바다에 수장시키는 상징적인 대목이다.


이번 번역본에는 2002년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 타자본 두 장 분량의 수기 원고도 수록했다. 정본과는 다른 내용의 결말이 담겨 있는데, 이 원고에서는 나다가 스스로 죽는 게 아니라 나다를 포함해 무책임하게 도망갔던 총독과 각료들을 사람들이 뱃전 아래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디에고의 마지막 대사.

'빅토리아를 살리는 대신 나를 죽여. 내 삶은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삶을 사는 이유지.'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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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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