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편집상을 싹쓸이해 오스카 5관왕에 오른 영화 '아노라'는 미국의 한 창녀가 우연히 러시아 재벌의 망나니 아들과 즉흥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를 보는 여러 독법이 있겠지만 현대사회의 계급 양극화를 희화적으로 부각시키며 오히려 진실한 인간성은 없는 자에게 찾을 수 있다는 구원을 그려낸 것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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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11일(현지 시간) 테슬라 모델S에 앉아 기자들과 얘기하고 있다. [AP/뉴시스] |
여기에 등장하는 재벌의 모습은 팟캐스트 방송에서 마리화나를 피워대며 여러 여자에게서 14명의 자녀를 얻은 '망나니' 일론 머스크와 닮았다. 머스크는 저출산 풍조에 맞서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겠다며 체외수정, 대리모 등 '과학적 출산'으로 다둥이 아빠가 됐다. 그가 주도하는 정부효율부(D.O.G.E.)는 얼마 전 1만 명에 달하는 연방공무원을 해고했다. 가장 최근에는 백악관 회의에서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몸소 부동산 재벌에서 국가 최고 권력자로 싹쓸이 신분상승에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천재 머스크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신(新)특권계급'이라 할 수 있다.
머스크가 대표하는 신특권계급이란 누구인가. 자본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쥔 계층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최초의 권력자는 정교(正敎)일치의 사제들이었다. 신의 대리인인 제사장은 하늘의 뜻을 참칭해 세속의 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중세 교황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신탁(神託)통치는 계속되다가 르네상스와 종교혁명, 과학혁명을 거쳐서야 비로소 정교분리의 인간 권력자가 등장했다. 이윽고 산업혁명으로 자본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권력과 자본의 긴장관계도 시작됐다. 이 둘은 때론 제국주의 동인도회사나 미국 군산복합체처럼 결탁한 순간도 있으나 대체로 대치 상태를 유지해왔다. 자본이 너무 커지면 반독점법, 재벌해체와 같은 초비상 수단을 휘둘러 권력은 금력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공공성을 책임지던 권력까지 시장 자본이 장악하면서 전례 없는 괴물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신특권계급이다. 공공 부문의 효율화를 주장하면서 자본이 시장원리를 갖고 깊숙히 개입하거나 아예 스스로 공공사업을 대신하겠다고 나선다.
신특권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정치를 이용한다. 이들은 합법적인 사회제도를 활용해 지배력 확장에 몰두한다. 마치 사회가 이들 슈퍼스타의 폭주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도와주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 저항했던 대중 역시 부와 권력을 누리며 화려하게 사는 그들을 영화배우나 가수 같은 연예인 숭배하듯 동경하고 팬덤을 형성하며 받아들인다. 게다가 당대에 본인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든 상속 등 세습으로 물려받아 이룬 것이든 그냥 나와 다른 별천지로 순순하게 인정하거나 오히려 엔터테인먼트 쇼 보듯 관상용으로 소비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신특권층의 부상은 20세기말부터 21세기 초에 걸쳐 국가 권력과 자본에서 산업화 세력이 퇴장하고 정보화, 지능화 세대가 들어서는 타이밍과 절묘하게 겹쳐있다. 전 세계에서 근대국가 이후 작동해온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좌우 포퓰리스트가 등장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글로벌 신자유주의에서 국수적 보호무역으로 넘어가는 경제의 위기는 엘리트 특권층이 솟아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들은 정확한 명칭과 등장 시기는 몰랐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이들의 출현을 예고해왔다. 멀리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소설은 놀랍도록 발달한 과학기술이 인간성 말살과 효율적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한 디스토피아를 소름끼치게 묘사하고 있다. 가까이 넷플릭스 OTT 드라마 '제로데이'에 등장한 국가 전복세력은 놀랍게도 디지털 재벌과 결탁한 권부 내부세력이었다. 제도 안의 특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제도를 공격하고, 자신만의 유토피아 독재로 치달으려 하는 미친 시대에 우리는 진입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 한국을 상대로 광인 전략(mad man strategy)에 몰두하는, 비정상이 정상을 압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ab-new normal)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엘리트인 신특권계급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할 것인가. 아니 이들에게 대응할 효과적인 방법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새로운 지배세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저항수단은 무엇일까. 이런 새로운 물음에 이제 시대는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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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분야를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KPI뉴스 논설위원(2024.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대외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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