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 낙산성곽에 왜 '邑井'이라고 새겨져 있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5-09-09 15:58:33
[김덕련의 역사산책 28] 한양도성 각자성석
'케데헌' 흥행 계기로 붐비는 낙산공원 성곽길
낙산성곽에 충청·전라 군현 명칭 각자성석 다수
세종 때 충청·전라 백성이 낙산성곽 개축 담당
한양도성 만든 백성의 희생과 노고 생각했으면

서울시 종로구 낙산공원 성곽길로 세계 각국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힘이다. '케데헌' 주인공 루미와 진우가 함께 걸으며 마음을 나눈 성곽길이 바로 이곳이다.

낙산성곽은 한양도성 순성 코스 중 낙산 구간에 해당한다. 혜화문에서 장수마을, 낙산공원, 이화마을, 한양도성박물관을 거쳐 흥인지문까지 2.1km 구간이다.

루미와 진우처럼 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글자가 새겨진 돌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한양도성박물관 오른쪽 위편 성곽에 자리한 돌도 그중 하나다. 이 돌엔 '邑井'이라고 새겨져 있다. 

 

▲ '邑井'이라고 새겨진 낙산성곽 각자성석 이미지.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 『서울 한양도성』 PDF 갈무리]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읍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한양도성이 축조된 조선 시대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썼다. 따라서 '정읍'으로 읽어야 한다.

이렇게 글자가 새겨진 성벽 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그런데 '정읍' 각자성석은 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자성석 변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각자성석은 대부분 한양도성, 수원 화성, 지방 읍성 등 조선 시대에 진행된 축성 과정의 산물이다. 가장 오래된 각자성석은 고구려 평양성에서 발견됐는데, 아쉽게도 몇 개 안 남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한양도성 각자성석은 2022년 기준 297개다. 각자성석에는 공사 관련 정보가 담겨 있다. 그래서 각자성석을 '조선판 공사 실명제 유물'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명제의 기본 요소인 공사 관계자 이름이 모든 각자성석에 담긴 건 아니다.

돌에 새긴 내용은 시기별로 다르다. 크게 태조 때, 세종 때, 조선 후기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태조 때인 1396년(태조 5년) 처음 축조됐다. 평지엔 토성, 산지엔 석성을 쌓았는데, 전체를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별 담당 군현을 정해 공사를 맡겼다. 각 구간 명칭은 천자문에 수록된 글자를 '天'(하늘 천)부터 순서대로 붙여 정했다.

이 시기 각자성석엔 구간 명칭 중심으로 글자를 새겼다. 예컨대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 각자성석은 97개 중 48번 구간으로 길이가 600척이라는 뜻이다. '崗'은 천자문의 48번째 글자다.

한양도성은 세종 때인 1422년(세종 4년)에 개축됐다.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는 대공사였다.

세종 때 각자성석에는 공사를 담당한 군현 명칭을 새긴 경우가 많다. '邑井' 즉 정읍도 그중 하나다. 전라도 정읍 백성들이 동원돼 그 구간 공사를 담당했다는 뜻이다.

낙산성곽에는 정읍 이외에도 군현 명칭을 새긴 각자성석이 여럿 있다. 혜화문 쪽에서 충청도 군현, 흥인지문 쪽에서는 전라도 군현 명칭 각자성석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세종 때 낙산성곽 개축 공사 부담을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들이 나눠 떠안아야 했다는 얘기다.

이들뿐만 아니라 영남 사람들의 피땀도 낙산성곽에 배어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조한 태조 때 낙산성곽 공사를 담당한 이들이 바로 경상도 백성들이었다.

구간 또는 담당 군현 명칭을 새긴 각자성석에는 '공사 결과물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군현에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조정은 공사를 담당한 군현 수령들에게 '돌 한 개라도 무너지면 죄를 묻겠다'는 지침을 내렸다.

한양도성은 조선 후기에도 몇 차례 보수된다. 조선 후기에는 각자성석에 공사 시기, 감독관, 공사를 담당한 장인 이름 등까지 새겨 태조나 세종 때보다 책임 소재를 더 명확히 했다.

이처럼 낙산성곽의 '정읍'을 비롯한 각자성석은 한양도성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나 각자성석에 담기지 않은 스토리도 아주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백성의 고통이다.

태조 때 전국에서 19만7449명, 세종 때는 32만2460명이 한양도성 공사에 동원됐다. 세종 때를 예로 들면, 백성 1인당 40일 치 식량을 준비해 한겨울인 음력 1, 2월에 진행된 공사에 임하게 했다.

수령들은 동원된 백성을 혹사시켰다. 그게 문제가 되자 조정은 수령들에게 인정(밤 10시경)과 파루(새벽 4시경) 사이에는 부역을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책으로 얘기됐지만, 이는 그 6시간을 제외한 하루 18시간은 일을 시켜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상자가 속출했다. 공사 기간 중 사망자만 872명에 달한다고 조정에 공식 보고됐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동원됐다가 공사가 끝난 후 죽은 백성도 많았다고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데, 정확한 인원수는 기록돼 있지 않다.

태조 때를 비롯한 다른 시기까지 포함하면 한양도성 공사에서 희생된 백성의 수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양도성이 있을 수 있는 건 그러한 백성의 희생과 노고 덕분이다. 한양도성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 도성을 만든 백성들에 대해 더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요 참조=『서울 도성을 품다』(서울역사박물관, 2012), 『서울 한양도성』(서울역사박물관 한양도성연구소, 2015), 『한양도성 각자성석과 축성기록』(서울시, 2015), 문인식 논문(「한양도성의 각자성석에 대한 종합적 고찰」, 『서울학연구』 55, 2014), 『조선왕조실록』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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