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 지속…공식 수치 없이 피학살 추정치 다수
주로 인용되는 사례는 6661명…출처는 독립신문
일본 사법성, 약 230명 주장…희생자 규모 왜곡
일본 극우, '수치 불명확·과장…학살 없었다' 궤변
'간토대학살 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진상 조사, 책임 규명, 명예 회복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할 위원회가 국무총리 소속으로 구성돼 최대 6년 동안 활동하게 된다.
1923년 9월 일본인들이 간토대학살을 자행한 후 102년 만이다. 그간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하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고 진상을 덮는 데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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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개봉한 '1923 간토대학살'(감독 김태영·최규석)은 간토대학살의 비극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 중 하나다. 이미지는 이 영화 감독판 방영을 알리는 TVING 예고편의 한 장면. [TVING 화면 갈무리] |
지속적 은폐로 인해 사건 발생 후 한 세기 이상이 지났음에도 밝혀지지 않은 사항이 적지 않다. 그중 하나가 간토대학살 조선인 피학살자 수다. 학살된 인원 규모 파악은 진상 규명의 기본 작업 중 하나인데, 현재까지 공식 수치가 없다. 여러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주로 인용되는 추정치는 6661명이다. 출처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 보도다. 독립신문은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923년 12월 5일 자 기사에서 간토대학살로 희생된 조선인이 6661명이라고 제시했다.
독립신문은 간토대학살 초기부터 호외를 발행하는 등 조선인 피해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매체다. 6661명이라는 수치는 학살 다음 달부터 일본 현지에서 피해 상황을 조사한 재동경이재조선동포위문반(이하 위문반) 활동에 관여한 독립신문 특파원이 취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학살자 규모를 6000여 명으로 서술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번 특별법안에도 6000여 명의 조선인이 누명을 쓰고 대학살을 당했다고 표현돼 있다. 6000여 명은 독립신문이 제시한 6661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수치로 보인다.
6661명 또는 6000여 명에 비해 덜 인용되지만 2600여 명이라는 추정치도 있다. 위문반이 1923년 12월 열린 동경조선인대회에서 발표한 2611명, 위문반 활동에 참여한 최승만이 1970년 국내 잡지에 제시한 2613명 등이 이에 해당된다.
2만3000여 명이라는 추정치도 있다. 사건 이듬해인 1924년 3월 독일 외무성에서 작성한 'Massacre of Koreans in Japan'이라는 자료에 총 2만3058명의 조선인이 학살됐다고 제시돼 있다. 항일 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자료에 기록돼 있는데, 이 역시 위문반 조사를 바탕으로 한 정보로 여겨진다.
이 수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견해가 엇갈린다. 간토 지역에 체류한 조선인 규모를 감안할 때 2만3000여 명은 과다해 보인다는 연구자가 있고 근거가 충분한 추정치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일본 정부에서 제시한 수치도 있다. 보통 두 가지가 거론된다. 첫 번째는 일본 사법성(현 법무성)에서 발표한 조선인 희생자 약 230명이라는 수치다. 그러나 이는 피학살자 규모를 대폭 축소해 진상을 왜곡했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다.
이 수치에는 일본 민간인들이 결성한 자경단이 자행한 학살 결과만 담겨 있다. 군대와 경찰이 주도한 학살은 빼놓았다는 얘기다. 그간 학살 문제에서 국가 책임을 계속 부정해온 일본 측 전략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자경단의 학살 규모를 터무니없이 축소한 것도 문제다. 이는 가나가와현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 사법성은 여기서 조선인 2명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1923년 11월 가나가와현 지사가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고한 공문서 내용은 전혀 다르다. 2023년 공개된 이 문서에는 1923년 9월 2일부터 사흘간 일본인들이 조선인 145명을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두 번째는 일본 내각부 중앙방재회의에서 간토대지진 피해 보고서에 조선인·중국인 희생자가 지진 재해에 의한 사망자의 1 내지 수 퍼센트라고 서술한 것이다. 당시 사망 또는 행방불명자가 10만5000여 명이니 1퍼센트면 1000명이 넘는다. 하지만 중국인 희생자와 뭉뚱그려, 그것도 1 내지 수 퍼센트라고 모호하게 표현하고 넘어간다는 점이 문제다.
민간의 일본 극우 사이에서는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조선인이 조사해 독립신문 등에 발표한 피학살자 수치가 불명확하거나 과장됐고 이는 학살 사실 자체가 애매하거나 조작됐기 때문 아니냐는 궤변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 학자들은 물론 양심적인 몇몇 일본인 연구자가 지적한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조선인 희생자 수가 불명확한 것은 기본적으로 가해자인 일본 측이 범죄를 은폐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학살 후 시신을 태우거나 은닉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망자 수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본 측은 또 실태 파악에 나선 위문반을 감시하고 조사를 방해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위문반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은 얼마 전까지 학살의 광기가 판치던 곳을 다니며 피해 상황을 조사해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를 고려하면, 피학살자 규모 추정치 편차가 큰 것은 학살을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일본의 가해 및 책임 회피의 상징 중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하나는 희생자 추정치의 편차를 과도하게 문제 삼으며 가해 책임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는 시도는 일본 극우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점이다. 1937, 1938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한 난징대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 극우는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주요 참조=김강산 논문(「1923년 관동대학살을 둘러싼 쟁점과 과제」, 『역사비평』 145, 2023), 다나카 마사타카 논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연구의 과제와 전망 – 일본에서의 연구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48, 2015), 장세윤 논문(「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연구현황과 과제」, 『동북아역사포커스』 6, 2023)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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