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도굴·약탈된 것일까…가야 금관 미스터리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5-11-11 15:57:21
[김덕련의 역사산책 37] '철의 나라' 금관
현존 가야 금관은 2점…서울, 도쿄에 각 1점
'신라 금관보다 구성이 간결하고 독창적' 평가
전(傳) 고령 금관, 도굴 사건 계기로 세상에 나와
전 경상남도 금관, 돌려받아야 할 약탈 문화재

금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 신라 금관 6점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인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박물관 측이 지난 3일 '하루 관람 인원 제한' 조치를 공지해야 했을 정도다.

금관은 신라만이 아니라 '철의 나라'로 불리는 가야에도 있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 가야 금관으로 인정받은 것은 2점이다. 1점은 서울 리움미술관에, 다른 1점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 

 

▲ 리움미술관에 있는 가야 금관(왼쪽 사진)과 도쿄국립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의 가야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갈무리]

 

가야 금관은 신라 금관보다 수는 적지만 구성이 간결하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양식 측면의 특징은 금관 윗부분의 세움 장식 형태에서 잘 드러난다.

가야 금관의 세움 장식은 풀꽃이나 풀잎 모양이다. 사슴뿔이나 나뭇가지 모양인 신라 금관의 세움 장식과 확연히 구분된다. 가야 금관의 세움 장식이 전남 나주 독무덤(옹관묘)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관과 같은 형식이라는 점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가야 금관은 2점 모두 출토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름에 '어디서 출토됐다고 전해지는'이라는 뜻의 한자 '전(傳)'이 붙는다. 리움미술관 금관의 공식 명칭은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이다. 도쿄에 있는 금관은 '전 경상남도 금관' 또는 '전 창녕 금관'으로 불린다.

가야 금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는 현풍 도굴 사건이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에 사는 농민을 포함한 도굴꾼들이 1961년부터 현풍면은 물론 인근 지역인 고령과 성주의 고분까지 도굴해 출토품을 밀거래하다 1963년에 검거됐다.

조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놀라운 진술을 했다. 고분에서 금관도 파냈다는 것이었다. 금관이 골동품상을 거쳐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에게 팔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 회장은 검찰 조사를 받았다.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공식 발굴을 통해 금관이 출토되기 10년 전 시점이다. 도굴됐다는 금관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관이 공개되지 않아 '일본으로 유출됐을지도 모른다'는 풍설이 떠돌았다.

그로부터 8년 후 '전 고령 금관'이 공개됐다. 1971년 이 회장이 그간 수집한 문화재를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자리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리고 같은 해 국보로 지정됐다.

'전 고령 금관' 제작 시기는 5~6세기로 추정된다.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기 직전 시기인 6세기 전반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금관의 주인은 대가야 왕 또는 최고위급 인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달성군의 세칭 팔장군묘에서 출토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대다수 연구자는 출토지가 고령일 것이라고 본다. 그곳에는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의 45호분과 44호분이 출토지 후보로 주요하게 거론된다.

2020년 '전 고령 금관'에 부속된 것과 같은 형식의 금제 장신구가 45호분에서 나왔다. 이를 계기로 45호분은 유력한 출토지 후보로 떠올랐다. 이와 달리 고분 규모나 순장된 사람 수에서 45호분을 능가하는 44호분에 금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또 다른 금관인 '전 경상남도 금관'은 도쿄국립박물관의 오구라 컬렉션에 있다. 컬렉션에 전시된 유물들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것으로 1981년 이 박물관에 기증됐다. 오구라는 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전기 회사를 운영하면서 엄청난 양의 한국 문화재를 긁어모은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전 경상남도 금관'도 오구라가 그렇게 모아 반출한 약탈 문화재 중 하나다. 정식 발굴 조사를 거쳐 출토됐다는 근거가 없으니 도굴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디 묻혀 있다가 도굴·약탈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경남 어딘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의미의 '전 경상남도 금관'으로 얘기될 뿐이다. '전 창녕 금관'이라는 별칭은 일제 강점기에 경남 창녕의 고분들에서 도굴된 유물 중 다수가 오구라 손으로 넘어갔는데 이 금관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정에서 비롯됐다.

'전 고령 금관'과 마찬가지로 이 금관의 주인도 대가야 왕 또는 최고위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와 달리 금관 주인을 창녕에 있었던 것으로 얘기되는 비화가야 지배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금관을 비롯해 오구라가 반출한 유물들은 1950~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에서 논란이 됐다. 한국 측은 이 유물들이 대부분 도굴품이니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측은 개인 소장품 즉 사유 재산이라며 거부했다. 개인 소장품에서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으로 바뀐 후 40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반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요 참조=정동락 논문(「傳 고령 출토 가야금관의 출토지」, 『문물연구』 41, 2022),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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