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 소재로 한 '한복 입은 남자', 뮤지컬어워즈 대상
장영실은 중국계…부친이 한반도 온 경위 추측 무성
기존 사료에 나오지 않는 새 기록, 2022년에 확인돼
학계에서는 일각의 장영실 신화화 우려하는 목소리도
조선 세종 때 활동한 과학자 장영실을 소재로 한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가 지난 19일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5년 초연된 국내 창작 뮤지컬 가운데 최고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상연 중인 이 작품은 장영실이 생애 후반부에 유럽으로 건너가 활약한다는 설정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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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출연 배우들이 지난해 12월 9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주요 장면 시연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년) 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한 후 의금부 국문을 거쳐 처벌을 받는다. 가마 제조를 감독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관련 서술을 끝으로 장영실은 당대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도 알 수 없다.
이는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세종이 천문 관측 기구를 여럿 제작한 장영실을 명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내치는 척하며 빼돌린 것 아닐까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장영실의 유럽행 설정도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 중 하나다.
장영실은 출생과 초년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장영실 관련 글들을 보면 대개 아산 장씨이며 1385~1390년경 태어났을 것이라고 나오지만, 아산 장씨 집안의 역사를 기록한 세보(世譜) 정도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장영실의 태생에 관한 조선왕조실록 기사는 아주 간략하다. 1433년(세종 15년) 세종이 신하들에게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세종은 장영실의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선왕인 태종이 장영실을 보호했고 자신도 아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영실이 중국계 조선인임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아산 장씨 세보에도 장영실이 중국계로 기록돼 있다. 다만 장영실의 선조가 언제 한반도에 왔는지 등에 대해서는 실록과 다르게 설명한다. 세보에는 송나라 대장군 출신인 장영실의 9대조가 고려 때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했고, 장영실 부친이 고려에서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세보도 소중한 기록이지만 실록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게 사실이다. 특정 가문의 역사를 후손이 정리한 세보보다는 공식 편찬 사서인 실록이 더 공신력 있는 사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원나라 사람인 장영실의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한반도에 오게 됐을지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나왔다. 그중에는 장영실이 중국인 범죄자 아들일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있다. 장영실 부친이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고려로 도망해 지금의 부산인 동래현의 관기(官妓)와 살면서 장영실이 탄생하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장영실 부친과 범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한 연구자는 장영실 부친이 단순한 귀화인이 아니라 조선 왕실에서 비밀리에 데려온 과학 기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장영실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세종실록에는 북방에서 야인에게 포로로 잡힌 중국인 기술자들이 조선으로 도망쳐 오자 조선 조정에서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생으로 아내를 삼게 하며 후대한 사례가 나온다. 조선 조정에서 장영실 부친에게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정착을 유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흥미로운 가설이긴 하지만 이를 입증할 사료는 없다.
이런 가운데,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장영실 관련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2022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를 다룬 2023년 논문에 따르면, 해당 기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이하 '현판')에 남아 있다.
'현판'은 조선 시대에 활자 주조를 관장한 기관인 주자소에 걸려 있던 것으로 1858년(철종 9년)에 제작됐다. '현판'에 새겨진 신하 명단에 '장영실'도 있다. 장영실은 1434년(세종 16년)에 주조된 금속 활자인 갑인자 제작에 참여했다.
이름과 함께 간단한 인적 사항도 실려 있다. 자는 '실보', 태어난 해는 '계유' 즉 1393년(태조 2년), 본관은 '경주인' 즉 경주 장씨라는 것이다. 모두 기존 사료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문제는 장영실이 활동한 때로부터 400년 정도 지난 후 기록된 이 내용을 그대로 믿어도 괜찮을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장영실이 활동할 무렵 기록된 사료들에서 경주 장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걸리는 대목이다.
이처럼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장영실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반가운 발견임은 분명하다. 경주 장씨 부분과 관련해서는 당시 장영실의 행적이 묘연해진 후 그 후손이 아산 장씨에 투탁한 결과 경주 장씨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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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영실은 그간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됐다. 이미지는 장영실(오른쪽, 최민식 분)과 세종(왼쪽, 한석규 분)을 소재로 한 영화 '천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
장영실 미스터리와 관련해 짚어야 할 사안이 하나 더 있다. 신화화 논란이다.
장영실이 1442년 가마 사건을 계기로 당대의 기록에서 사라진 후 조선의 공식 기록에서는 장영실에 관한 내용을 찾기 어렵다. 실록 1519년(중종 14년) 부분에서 장영실을 세종 때 악기를 만든 기술자로 언급하고, 승정원일기 1729년(영조 5년) 부분에서 세종 때 각종 기기를 만드는 데 뛰어난 '장영'이 있었다고 이름을 잘못 거론하는 정도다.
이와 달리 18세기 실학자 이긍익이 민간에서 쓴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에는 장영실에 관한 내용이 적잖게 담겨 있다. 하지만 관청에서 편찬한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잊힌 존재나 다름없던 장영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되살아났다. 식민 사학을 앞세워 한국사를 왜곡하는 일제에 맞서 조선의 과학 전통을 다시 살피는 과정에서 장영실이 재조명됐다. 노비 출신의 파란만장한 삶이라는 점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재조명을 넘어 신화화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예전부터 학계에서는 세종 시기 조선의 과학적 성과를 대부분 장영실 혼자 이뤄낸 것처럼 오해되면서 동시대의 다른 뛰어난 과학자들의 성과가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일각에서 장영실 신화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신화화 대신 조금 더 담백하게 장영실에게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신화화하지 않아도 장영실의 삶은 충분히 극적이고 그가 뛰어난 과학 기술자였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주요 참조=김성진 논문(「記錄文에 대한 想像的 接近의 일례 ― 장영실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 『동양한문학연구』 27, 2008), 강민경 논문(「<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鑄字監董諸臣題名錄 懸板]>의 역사적 가치 - 장영실을 비롯한 조선 초기 인물의 인적 사항을 중심으로 -」, 『고궁문화』 16, 2023)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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