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망명한 유구국 산남왕은 삼별초 후손?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5-08-28 16:38:04
[김덕련의 역사산책 27] 산남왕 망명 수수께끼
조선왕조실록에 산남왕 부자 망명 관련 기사들
'산남왕 온사도'·'아들 승찰도'가 누구인지 논란
망명 경로·시기와 사망 관련 사항 등도 불명확
여러 주장 제기돼…삼별초 후손설은 근거 미약

지난 24일 경북 봉화에서 베트남 리(李) 왕조(1009~1225) 창건자인 리 태조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봉화는 리 태조의 후손인 화산 이씨가 뿌리내린 지역이다.

화산 이씨 시조는 리 왕조 6대 황제 영종의 아들 이용상이다. 이용상 일행은 왕조가 무너질 무렵 고국을 떠나 항해 끝에 고려에 도착했다. 고려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용상에게 화산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이용상 아들 이일청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봉화와 안동 일대는 화산 이씨의 세거지(집성촌)가 된다. 

 

▲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있는 슈리성의 성문 중 하나인 슈레이몬(수례문). 슈리성은 유구국의 궁성이었다. [오키나와관광컨벤션뷰로 홍보 영상 갈무리]

 

망국의 황족이 위기의 순간 탈출해 바다 건너 머나먼 한반도까지 왔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면이 있는 또 다른 사례가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는 유구국 산남왕 망명 건이다.

먼저 실록의 두 기사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1394년(태조 3년) 9월 9일, 두 번째는 1398년(태조 7년) 2월 16일 기사다. 끊어 읽기와 해석은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을 따랐다.

"유구국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서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중략) 망명한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후략)"

"유구국의 산남왕 온사도(溫沙道)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가 그 나라의 중산왕에게 축출당하여 우리나라의 진양(晉陽)에 와서 우거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衣食)을 주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의복과 쌀·콩을 주어 존휼(存恤)하였다."

이것 말고도 산남왕 관련 기사가 실록에 3건 더 있다. 2건은 산남왕이 1398년 4월과 윤5월 조회에 참여했다는 내용이다. 진양 즉 지금의 경남 진주에 머물던 산남왕이 서울에 올라와 태조 이성계를 만났다는 얘기다. 다른 1건은 같은 해 10월 산남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다.

이 기사들을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유구국은 오키나와 제도에 있던 나라다.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 영토지만, 산남왕이 실록에 기록되던 시기에 유구국은 독립 국가였다.

당시 유구국은 소국들이 할거한 삼산(三山) 시대(1322~1429)였다. 주요 세력은 산북(山北)국, 중산국, 산남국이었다. 중산국이 가장 강해 1416년 산북국을, 1429년에는 산남국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이루게 된다.

배경지식을 토대로 기사들을 다시 읽어보자. 산남왕 온사도가 인근 최강자인 중산왕에게 쫓겨나 조선으로 망명해 조선의 보호를 받다가 사망했고, 그 아들 승찰도도 조선에 와 있었다는 그림이 나온다.

문제는 명료해 보이는 이 그림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등에 남아 있는 유구국에 관한 다른 사료와 비교·검토하면 산남왕 관련 기사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온사도와 승찰도가 누구인지부터 논란이다. 실록에는 온사도가 산남왕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산남국 역대 통치자를 언급한 다른 사료들에는 온사도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실록에 산남왕 아들로 기록된 승찰도는 다른 사료들에는 산남국을 세우고 60년 정도 다스린 왕으로 나온다. 그런데 생몰 연도도, 퇴위 시점도 불분명하다. 실록 속 온사도와 승찰도는 동일인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산남왕이 어떤 경로로 한반도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다. 망명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승찰도는 1394년, 온사도는 1398년에 망명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실록에 1394년은 중산왕이 승찰도 송환을 요청한 시기로 나온다. 이것을 근거로 이해에 승찰도가 망명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또 1398년 기사에 국가에서 해마다 온사도에게 옷과 음식을 줬다고 기록돼 있다. 해마다 줬다는 것은 1398년 이전부터 줬다는 뜻이다. 이는 1398년 망명 주장과 충돌한다.

사망 관련 사항도 불명확하다. 실록에는 1398년 10월 산남왕 온사도가 "死(죽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어디서 죽었는지, 사망 원인이 무엇인지 등을 알 수 없다. 산남왕과 함께 왔을 다른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흥미롭지만 사료는 적은 유구국 산남왕 망명 이야기와 관련해 국내외에서 여러 주장이 제기됐다. 산남왕이 삼별초의 후손일 것이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삼별초 항쟁은 1273년 몽골군과 고려 정부군의 연합 공격으로 제주에서 막을 내렸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 삼별초 잔존 세력이 그해 제주에서 오키나와로 건너갔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07년 오키나와의 13~14세기 기와 유물이 삼별초 항쟁지였던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기와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나온 주장이다.

삼별초 후손설은 삼별초의 오키나와행을 전제로 한다. 산남왕이 삼별초 후손이기 때문에 가까운 중국 본토나 대만 대신 머나먼 조선으로 망명한 것 아니겠느냐는 추정이다.

눈길을 끄는 주장이지만 뚜렷한 근거 자료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전제로 삼은 삼별초의 오키나와행 주장 자체가 학계의 통설과 거리가 멀다. 유구국 산남왕의 조선 망명 이야기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주요 참조=양수지 논문(「朝鮮·琉球關係 硏究 - 朝鮮前期를 中心으로」, 한국학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1993), 『조선왕조실록』,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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