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조명이 밝아지면 낡은 극장과 간판이 보인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충청도 시골 변두리 '레인보우 영화관'이다.
'레인보우 시네마'의 폐관을 계기로 주인 조한수와 그의 부친이자 초대(初代) 주인인 조병식, 한수의 아들 조원우 등 3대가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영사실 창고에서 꺼낸 앨범처럼 그들의 시간은 오래 전에 멈춰져 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생채기를 내듯 과거의 사건을 꺼내는 일은 고통스럽다.

정의신 작가는 극 중 인물들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오타쿠(御宅)'로 묘사한다. 원우는 동성애라는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시골로 도피해 왔고, 태호는 그런 그를 찾아온다. 정숙은 치매에 걸린 노모와 어렵게 하루 하루 버틴다. 수영은 죽은 원식의 친구다. 왕따당하는 친구를 돌보지 못한 자책감에 시달림다. 사회와 괴리되어 지금은 인형탈을 쓰고 사람과 접촉을 피한 채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돌리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자 낡은 영화관 곳곳에 빗방울이 스며들어 뚝뚝 떨어진다. 원식이 죽은 지 10년. 빗줄기를 막을 수 없듯이 과거는 다시 현실에 나타나고, 술 취한 원우가 하소연을 시작하자 모두 각자의 아픔을 내보인다.
한수는 원식의 사망 원인을 알려고 고발을 하고 재판까지 했지만 진실을 알기는커녕 입방아에 오르기만 했다. 원식이 물리적 죽음 이후에도 거듭 살해당하는 현실에 오열한다. 원식의 죽음에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울부짖지만 "그날 아침 얘기를 좀 더 들어줬더라면" 하는 탄식만 할 뿐이다.
또한 원우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그게 원식이 자살한 이유이라고 떠들어 댈까 봐, 모든 비난이 자신을 향할까 봐 무서워 도망친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늘 죄의식 속에 산다. 병식도 손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하고 방관자로 지낸 시간을 자책한다. 그동안 마주보지 못한 채 피하려고만 했던 각자의 진심을 비 오는 이날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물들의 사정을 통해 각자가 지닌 아픔을 담담하게 들려주고 들어준다.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처럼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아픈 현실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정의신 작가 특유의 휴머니즘과 위로와 치유를 주는 카타르시스를 구태환 연출이 서사로 잘 풀어내고 있다. 지난 시즌 첫 공연부터 관객들의 환호와 찬사를 받았던 작품으로 이번에는 더욱 세밀해진 구성으로 위로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객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이따금 웃음이 터지게도 해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게 하면서 따뜻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 연기도 눈에 띈다. 맏형 조병식을 맡은 김재건은 현실 할아버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연기로 등장 때부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조한수 역의 박윤희는 충청도 시골 변두리 영화관에 얽힌 지린내 나고 포르말린 냄새 풍기는 추억을 소환하는 구수한 연기로 작품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박현숙의 변역과 손지형의 각색은 우리 정서에 잘 들어맞게 이뤄져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월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에서 제목을 따 왔다.
극 중에서 조한수는 "옛날 나탈리 우드가 나오는 영화 '초원의 빛'을 보고 곧바로 책방에 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집을 샀다"며 그 시집에 나오는 시귀인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어릴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다. 늙어서도 그러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 있을 의미가 없다'는 말로 편안해진 마음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응어리진 감정은 원식이 거울 속에 남긴 '고마왔어요, 모두' 라는 말로 남아 현실을 힘들게 살아 가는 이들에게 '괜찮다, 괜찮다'하는 위로를 보낸다. (4월 21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KPI뉴스 / 이성봉 기자 sblee@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