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소급 적용 안돼 소방안전관리자·스프링클러 등 없어
관련 법 개정, 공공주택 확보 등 근본적 대책 필요
지난 9일 종로의 한 고시원에서 7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사고는 노후 건물과 고시원이라는 장소의 화재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주거빈곤층이 주로 머무는 노후 고시원은 안전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있더라도 관리가 허술하다. 고시원 복도는 사람 하나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비좁고, 미로같이 얽혀있다. 객실은 몸 하나 눕히기에도 벅찬 공간 수십 개가 일부는 창문도 없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한 뼘 남짓한 이 낙후된 공간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상시적인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소방방재청의 '최근 5년간 다중이용업소 화재 현황'을 보면 2013년부터 지난 14일까지 발생한 다중이용업소 화재 3632건 가운데 311건(8.5%)이 고시원에서 발생했다. 5년 동안 한해 평균 52건의 고시원 화재가 발생한 셈이다. 전체 고시원 수는 2017년 기준 1만1899개다.
지난해엔 고시원에서 47건의 화재가 발생해 1명이 숨졌다. 2016년에도 7명이 고시원 화재로 숨졌으며, 2008년에는 서울 강남구 한 고시원에서 화재로 6명이, 같은해 경기도 용인 고시원에선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방 쪼개기·벌집형 객실·미로형 복도…화재에 취약한 열악한 건물 구조
고시원 화재가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지기 쉬운 이유로 우선 좁은 방들이 밀집해있는 건물구조가 꼽힌다. 일반적으로 고시원은 약 5㎡(1.5평)의 쪽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복도 등 탈출로가 좁아 여느 건물보다 화재 및 대피에 취약하다. 건물주가 임대수익을 늘리기 위해 방을 증설하는 '방 쪼개기'도 화재 위험성을 더욱 높이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고시원 자체가 불법으로 방을 쪼개거나, 방을 여러 개로 만들어 화재가 금방 번진다"며 "구조가 미로같이 돼 있어 화재가 났거나 각종 재난 때 대피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토교통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수도권·광역시에서 적발된 원룸·고시원의 불법적인 방 쪼개기는 최근 5년 간 한해 평균 1892건에 달했다. 김 의원은 "방 쪼개기는 환기시설과 대피로를 축소하고 내벽을 내화구조가 아닌 석고보드로 마감해 화재에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화재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도 2층 24개실, 3층 29개실로 'ㅁ'자 형태의 좁은 복도에 객실은 벌집처럼 빼곡하게 붙어있는 구조였다. 2층은 객실이 입주자로 모두 차 있는 상태였고, 3층은 26개실에 입주자가 거주했다. 2008년 방화로 7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친 경기도 용인 고시원도 8㎡(2.42평) 넓이의 작은 방 68개가 밀집된 벌집형 구조였다.
국일고시원의 경우 양방형 피난로도 확보되지 않았다. 이번 화재처럼 출입구 쪽에서 불이나 대피로가 막힐 경우 반대편을 이용한 피난이 가능해야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다. 건축법은 각 층의 바닥 면적이 200㎡(60.5평) 이상인 건축물의 경우 피난층 또는 지상으로 통하는 직통계단 2개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일고시원의 바닥 면적은 이보다 작아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두 방향 피난로는 확보하되, 완강기보다는 미끄럼대나 바깥계단을 설치하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완강기는 여건상 고령자가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법적인 방 쪼개기로 인해 창문 없는 방이 많다는 점도 문제를 키운다. 창문 없는 방은 화재 사고가 났을 때 유독가스에 더욱 취약하고 탈출이 어렵다. 국일고시원 화재 때도 창문이 있는 방 입주자들은 창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으나, 창문이 없는 방 입주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숨졌다.
소방 관련법 개정에도 소급 안돼…스프링클러·소방관리자 미비
1992년 이전에 지어진 노후 고시원은 소방안전관리자 지정 의무도 없다. 정부는 그 해 관련 법을 개정해 연면적 600㎡(181.5평) 이상 복합건축물에 소방안전관리자를 의무적으로 선임하도록 했다. 소방안전관리자는 소방시설의 자체점검을 의무적으로 실시해 소방서에 보고해야 한다. 소방시설을 정상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국일고시원은 연면적이 614㎡임에도 1983년에 건물이 지어져 법이 소급 적용되지 않아 소방안전관리자가 선임되지 않았다.
스프링클러 설비가 없는 것도 고시원 화재가 대규모 참사로 이어지는 원인이다. 고시원 화재 사고로 인명피해가 잦자 2009년 고시원을 포함한 다중이용업소의 화재·안전관리를 다룬 법안인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개정됐다. 개정된 법은 고시원의 안전 규정을 정비하면서 복도 폭을 120cm 이상으로 갖추도록 했으며, 고시원과 같은 숙박을 제공하는 다중이용업소의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했다.
문제는 법 개정 이전에 지어진 고시원들은 법의 소급 적용을 받지 않아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데 있다. 국일고시원도 2007년 고시원 허가를 받아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가 없다. 복도의 폭 역시 80cm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개정된 법들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소방시설법 제11조(소방시설기준 적용의 특례)에 명시된 "대통령령 또는 화재안전기준이 변경되어 그 기준이 '강화'되는 경우 기존의 특정소방대상물의 소방시설에 대하여는 변경 전의 대통령령 또는 화재안전기준을 적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일고시원 화재가 난 날 SNS를 통해 "결국 (법을) 소급 적용을 해야 한다"면서 "오래된 건물이라도 새로 바뀐 소방 규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비용이 들더라도 안전설비를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지난 13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행정안전부와 소방청 등 관계부처가 법 시행 이전부터 영업해온 시설에 스프링클러 같은 화재안전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법령 개정이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스프링클러 지원 사업도 있지만…
지난 2012년 서울시가 화재 사각지대인 낡은 고시원에 스프링클러 지원 사업을 확대했지만 여전히 스프링클러 없는 고시원이 대다수다.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 대상에서 제외된 노후 고시원은 서울에서만 1300여개에 이른다. 이중 221개 고시원에 서울시가 34억원을 투입해 스프링클러 설치를 지원했으나 1080곳에는 여전히 스프링클러가 없다.
서울시는 2009년 7월 이전부터 운영된 고시원 중 일용직과 무직 등 취약계층이 50% 이상 거주하는 고시원을 대상으로 스프링클러 설치비 3500만원 중 최대 2000만원을 지원한다. 나머지 비용은 고시원 측에서 부담해야 한다. 사업 도입 취지가 취약계층의 안전에 초점을 맞춘 탓에 5년 간 임대료를 동결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스프링클러 설치를 포기하는 고시원이 많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건물주의 동의도 받아야 하지만 녹록지 않다. 5년간 건물 용도변경이나 매매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국일고시원도 2015년 서울시의 고시원 간이 스프링클러 설치 지원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 있었지만, 건물주의 반대로 설치되지 못했다.
적은 예산도 걸림돌이다. 2012년부터 시작된 서울시의 노후 고시원 스프링클러 설치 지원 예산은 연평균 4억~5억원 정도다. 올해까지 약 34억원을 들여 매년 30곳 안팎을 지원했다. 이 예산 규모가 유지된다면 서울 내 모든 노후 고시원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려면 대략 30년 정도가 걸린다.
안전사회시민연대, 노년유니온 등 15개 시민단체들은 지난 14일 국일고시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시원을 포함한 모든 건물에 예외 없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서울시는 스프링클러 지원 예산을 늘리고 임대료 5년 동결 조건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지난 15일부터 20년 이상 된 소규모건축물 1600여 곳과 고시원 5800여 곳을 대상으로 비상구나 피난경로 실효성 여부와 스프링클러 설치 여부 등 안전점검을 실시하고 있다.

"땜질 처방 아닌 종합적 대책 마련해야"
하지만 스프링클러만 설치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시원이 근본적으로 안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형식적 점검과 땜질 처방으론 반복되는 화재 사고를 막기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스프링클러는 화재를 초기에 진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나 방 쪼개기 등 불법구조변경 금지, 피난시설 확보, 방염성능기준 충족 등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방시설 기준을 강화하고 점검 체계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고시원은 관리 주체가 분산돼 있어 관리 소홀로 나타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고시원이 관련법에 따라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를 모니터링 하는 곳은 허가관청인 시군구지만 화재 안전은 소방청, 건축물 관리는 국토교통부 소관사항이다.
지난 8월 말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의원은 화재에 취약한 건축물의 범위를 정하고 해당 건축물의 화재안전 성능보강을 의무화하는 건축법과 건축물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해 지난 22일 상임위에 상정된 상태다. 화재안전 성능보강이란 방화구획의 보완, 마감재의 교체, 스프링클러 등 소화설비의 설치 등을 말한다.
최창우 집걱정없는세상 대표는 "피난계단도 없는 곳에 고시원 스프링클러 설치로만 안전이 보장된다는 얘기는 문제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라면서 "고시원은 근본적으로 다중이용 비주택시설로 분류돼 임시방편적 주거시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어 "노후 고시원 거주자의 인권과 주거권을 보장하는 측면에서라도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면서 "소방시설이 미비하고 안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고시원을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로드맵을 만들고 동시에 공공주택 확보에 힘써 고시원 거주자들이 사람답게 살 곳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KPI뉴스 / 황정원 기자 hjw@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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