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때 최초 계엄" 李 대통령 발언, 사실 아니다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5-06-13 15:07:06
[김덕련의 역사산책 19] 한국 현대사와 계엄
첫 계엄, 1946년 10월 대구서 미군정이 선포
정부 수립 후 최초는 1948년 여순사건 계엄
여순사건과 4·3사건 계엄, 법적 정당성 논란
계엄법, 4·3 계엄 후 초안 제출돼 이듬해 제정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선거운동 기간이던 지난달 22일 "제주 4·3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상계엄으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학살당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4·3 학살에 대해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책임을 엄정하게 물었다면 (1980년) 광주 5·18 학살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재명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달 22일 제주시 동문로터리에서 유세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당시 4·3사건 때 선포된 계엄을 최초의 비상계엄으로 지칭했다. [뉴시스]

 

이 대통령 발언대로 비상계엄이 최초로 선포된 것은 4·3사건 때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현대사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 선포됐다. 선포 주체는 경북의 미군정 당국이었다. 서울에 있는 미군정 중앙이 아니라 경북 현지에 주둔하며 관할한 미군정 측이 자체적으로 선포했다는 얘기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 후 역대 계엄 사례를 정리한 다수의 언론 보도 가운데 1946년 선포된 이 계엄을 언급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 후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 시기의 이 계엄이 맞다.

경위는 이렇다. 그해 10월 1일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굶주린 부녀자 수백 명도 "쌀을 달라"며 이른바 기아(飢餓) 시위를 전개했다.

미군정의 정책 실패, 모리꾼의 매점매석 등으로 경제난이 심각하던 때였다. 특히 전국 곳곳에서 '쌀을 달라'는 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쌀을 구하기 어려웠다. 광복 후 1년 넘게 지났는데도 독립 국가 수립은 계속 미뤄지고 친일파가 준동하는 현실도 시위대의 불만을 키웠다.

그런데 경찰이 쏜 총에 대구역 일대에서 시위하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시위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경북 미군정 당국은 10월 2일 오후 포고 1호를 발포(發布)하고 대구에 계엄을 선포했다. 이어 6일까지 포고 2~6호를 연속 발포하며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시위는 대구 이외의 경북 지역은 물론 충청·전라 등 다른 도로 시차를 두고 확산됐다. 그러면서 그달 31일 전남 목포·무안 일대를 담당하는 미군정 당국도 계엄을 선포하게 된다.

광복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준점으로 잡더라도 4·3사건 때 계엄을 최초로 볼 수는 없다. 정부 수립 후 첫 계엄은 여순사건 때 선포됐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두 달 후인 그해 10월 19일 국군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이 선포됐다.

선포한 사람은 진압군 부대 중 하나인 5여단을 이끌던 김백일 중령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무장 부대 공격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의 일원이었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현지 지휘관이 임의로 계엄을 선포한 것으로 비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승만 정부는 그달 25일 대통령령으로 여순 지역에 다시 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11월 1일 호남 방면 계엄사령관이 자기 마음대로 계엄 지역을 전남북으로 확대하는 등 곳곳에서 계엄이 자의적으로 집행됐다.

계엄 선포 후 여순 지역에서는 즉결 처형 등을 통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심각했다. 그해 11월 17일 대통령령으로 선포된 4·3사건 관련 계엄도 그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계엄령은 주민 희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전에도 학살이 벌어지긴 했지만 계엄이 선포된 11월 중순 이후는 학살 강도와 규모 면에서, 또 전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11월 중순 이전엔 젊은 남성이 주로 희생된 데 비해 강경 진압 시기엔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이 사건 희생자가 대부분 이 시기에 발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보고서는 "계엄령이라는 이름 아래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재판 절차도 없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동족을 총살한 것은 일선 군 지휘관이 임의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정권 최상층에서 내린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 지시를 주목했다.

여순사건과 4·3사건 시기 계엄은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아 법적 요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공포됐다. 그래서 여순사건 계엄 선포 후 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계엄법은 그 이후인 1948년 12월 초안이 제출돼 이듬해 11월 제정됐다.

최초 계엄 시기에 대한 이 대통령 발언은 부정확했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타당하다. 오랫동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은 것이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점은 그간 여러 학자가 지적한 사항이다.

△주요 참조=김춘수 논문(「여순사건 당시의 계엄령과 군법회의」, 『제노사이드연구』 6, 2009), 김무용 논문(「제헌국회의 계엄령 헌법화와 계엄법안의 차별화」, 『한국사학보』 49, 2012), 김창록 논문(「1948년 憲法 제100조: 4·3계엄령을 통해 본 日帝法令의 효력」, 『법학연구』 39-1, 1998),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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