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테일러와 딜쿠샤, 그리고 손녀딸

오다인 / 2018-11-05 09:26:21
UPI 통신원으로서 3·1운동 최초로 전세계에 알려
손녀 제니퍼, 유품 1026건 서울역사박물관 기증

"일본이 이 장례식을 통해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면 큰 착각이다. 자기 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저 세상으로 가는 모습을 침통하게 지켜보는 한국인들의 가슴속에는 증오와 절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만세운동이 실패하고 수천명이 살해당했을 뿐 아니라, 자유의 마지막 상징이던 황제마저 죽었기 때문이다."
 

▲ 1919년 3월3일 앨버트 테일러가 촬영한 고종의 장례 행렬. 서울 종로구 2층 상가에서 고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군중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9년 2월 영국 여성 메리 테일러(Mary Taylor, 1889~1982)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치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1월22일 승하해 국장을 앞둔 때였다.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 1919~2015)는 2월28일 태어났다. 3·1운동은 다음날 시작됐고 고종의 장례식은 3월3일 거행됐다. 메리는 병실에서 3·1운동과 고종의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메리는 노년에 쓴 회고록 '호박목걸이'에서 그날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간간이 비명소리와 총성이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됐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문은 메리의 아들이 태어나던 때 세브란스병원 지하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들이닥치자 간호사들이 뭉치째 들고 와 메리의 침대 속에 숨겼다. 한국에서 사업하던 서양인들의 침대는 뒤지지 못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일본군은 지하의 인쇄기는 찾았지만 인쇄된 독립선언문은 찾지 못했다.

메리의 남편은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 평안북도 운산에 금광 채굴권을 얻어 아버지와 함께 1897년 한국에 온 미국인 사업가였다. 메리는 연극배우로 동양 순회공연을 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나 결혼, 1917년 한국에 왔다. 메리가 출산하기 전 앨버트는 고종의 장례식을 취재할 기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UP(United Press, 지금의 UPI) 통신원 자리에 지원, 명함을 받은 뒤였다.
 

▲ 앨버트 테일러 [제니퍼 테일러 제공]

 

앨버트는 막 출산한 아내와 아들을 보러 왔다가 침대 속 독립선언문을 발견한다. 메리는 앨버트가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회고했다. 그날 밤 앨버트는 동생 윌리엄을 시켜 독립선언문을 도쿄의 통신사로 전달한다. 윌리엄은 독립선언문을 구두 뒤축의 빈 공간에 숨겨 서울에서 도쿄까지 이동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 세계로 타전된 경위다.

외신들은 이를 토대로 '한국이 독립을 선포하다', '전체 한국이 움직인다', '한국인이 평화적으로 저항한다' 등으로 3·1운동을 보도했다. 1919년 4월10일자 '엘에이 레코드'는 UP가 '일본이 한국 탄압 완화를 거부한다'고 타전한 기사를 실었다.

독립선언문을 성공적으로 전한 뒤 앨버트는 다른 통신사 제안을 받아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기도 했다. 3월7일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지원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연합통신사(AP)의 한국 통신원으로 임명됐다"고 썼다. 그는 이후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라는 일본 영자신문 일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앨버트가 전업 기자로서 한국을 취재한 것은 아니다. 당시 통신원들은 자신의 사업을 하며 추가로 기자일을 했다. 1941년 말 태평양 전쟁으로 미·일 관계가 악화하자 앨버트는 서대문형무소 근방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감금되고, 메리는 가택연금을 당한다. 앨버트가 감금되자 메리는 UP 통신원 경력이 문제가 될까 봐 그의 기사가 담긴 책을 난로에 넣어 없앴다.

선교사 등 외국인들은 감리교신학대학교에, 도산 안창호 같은 한국인 독립투사들은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도산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을 모아뒀는데, 도산의 유족이 천안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이 기사들 가운데 UP가 보도한 3·1운동 기사도 보존돼 있다.

앨버트와 메리는 1942년 5월 한국에서 추방된다. 그전까지 테일러 부부는 '딜쿠샤'(Dilkusha)라는 집에서 살았다. 딜쿠샤는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인도 북동부 러크나우 지역 고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1923년 인왕산 자락 언덕에 2층짜리 붉은 벽돌로 지어져 남산과 한강까지 서울 시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현재 사직터널 위쪽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번지다.

 

▲ 3·1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UPI 초기 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의 거처 '딜쿠샤' [ 문재원 기자]

 

테일러 부부가 추방된 뒤 딜쿠샤는 주인 없는 집으로 전락했다. 빈민이 한두 가구씩 모여들다 한때 20여 가구까지 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맨노시노에 살던 아들 브루스가 2005년 샌프란시스코 한국 총영사관에 "부모님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딜쿠샤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하기까지 딜쿠샤는 '귀신 나오는 집' 또는 '은행나무집'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2016년 브루스의 딸이자 앨버트와 메리의 손녀딸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 1958~)는 딜쿠샤 유품 1026건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아울러 딜쿠샤에 얽힌 이야기를 담아 '아버지의 나라'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딜쿠샤 소재지를 찾아준 김익상 서일대학교 교수가 제작에 참여했다. 2006년 테일러 일가는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고, 딜쿠샤는 2017년 8월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앨버트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아버지와 함께 묻혀있다.

 

KPI뉴스 / 오다인 기자 odi@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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