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팍팍한 삶 견디기 위한 필수 요소
아웃도어 업체 MD로 일하던 조민근(30)씨는 지난해 하반기 퇴사했다. 그의 전 직장은 업계 특성상 연령대가 높은 고객들이 대부분이었고, 폭언도 일삼았다. "지나가는 사람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는 그는 결국 2년 차에 사직서를 꺼내고 말았다.
'취업 성공 패키지'와 같은 상품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할 만큼 취준생이 넘쳐나지만, '취뽀(취업 뽀개기·취직에 성공했다는 뜻)'한 청년들은 퇴사를 꿈꾼다. 실제로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층(15~29세)의 첫 직장 평균 근속기간은 1년 6개월(2018년 5월 기준)정도다. 첫 일자리를 그만둔 청년 임금노동자들은 그 이유로 보수, 근로시간 등 근로여건 불만족(51%)을 가장 많이 꼽았다.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일명 '퇴준생'도 많다. 다음소프트가 트위터, 블로그, 뉴스 등을 이용해 2019년 새해 목표와 계획에 대한 연관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8위에 퇴사가 올랐을 정도다. 지난해 10월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직장인 28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46.1%가 스스로를 퇴준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는 답도 37.6%를 차지했다. 퇴사 욕구가 가장 높은 연령은 20대로, 퇴사를 생각해보거나 실제로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86.4%에 달했다.

첫 직장 평균 근속 1년 6개월 불과
회사를 나온 조씨는 우연히 접한 영상 작업에서 적성을 발견했다. 그는 현재 주로 기업의 홍보 영상을 만드는 프리랜서로 일한다. 조씨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 행복의 원천을 찾아 서울 용산구 소월로에 자리 잡은 8평짜리 보금자리를 방문했다. 집 안 곳곳 양초가 가득했다. 양초에 관해 묻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양초를 켜두는 게 로망이었지만, 회사 다니면서는 꿈도 못 꿨다"며 웃는다.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벽이며 2층 침대, 러그, 소파, 스피커 등 소품 하나하나까지 주인장이 손품깨나 들였을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집이 곧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이랑 침대가 1m 거리"라며 조씨는 환하게 웃었다.
조씨의 또 다른 행복은 소월로 집을 자주 방문하는 친구들이다. 그는 정작 게임을 즐기지 않는데도 플레이스테이션을 중고로 샀다.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위해서다. 그는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친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그저 좋아하는 '미드나잇 재스민' 향 양초를 켜고, 친구들과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돼지고기와 건강을 생각하며 내놓은 양배추를 챙겨 먹는 저녁이면 충분했다. 남 좋은 일만 하는 것 같았던 '을'의 삶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신만의 삶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해 말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발표한 '2018 소비자행태조사 보고서' 속 트렌드로 선정된 소확행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것, 가족과 가까운 곳을 산책하거나 동네 맛집을 탐방하는 일상생활, 혹은 캘리그래피나 요리수업과 같은 혼자만의 작은 취미생활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오랜 언론고시 끝에 기자가 됐던 윤혜정(27·가명)씨가 입사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첫 직장을 그만둔 것도 '행복하지 않아서'였다. 입사 초부터 잦은 야근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업무를 마치면 "한잔하고 가자"며 붙드는 상사 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윤씨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잠들었다가 일어나자마자 출근하는 삶이 반복됐다"면서 "내 삶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학원 강사로 일하는 지금이 행복하다. 그는 "너무 바쁜 시기만 아니면 근무시간을 골라 들어갈 수 있어 내 시간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고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는 방송을 챙겨볼 시간도 없었는데, 지금은 콘서트에 갈 시간도 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삶에 여유가 생기니 직업 만족도도 높아졌다. 과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는 윤씨의 꿈은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에 짓눌렸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윤씨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사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길이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윤씨는 요즘 또 다른 행복을 찾았다. '맛집 투어'다. 회사에 다닐 때는 기사 마감에 허덕여 근처에서 서둘러 요기하거나, 취재원들과 약속으로 업무의 연장 선상인 경우가 많았다. 윤씨는 "그때 먹은 음식 중 맛이 기억나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유 시간이 많아진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과 편안한 분위기에서 공들여 선정한 음식을 먹는다.

"1990년대 청춘들 잉여짓이 한류 원천"
소확행은 팍팍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로 떠올랐다. 청춘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최근 서점가를 휩쓴 베스트셀러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저자 하완씨도 인터뷰에서 "낮에 맥주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퇴사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월급과 맞바꾼 행복"이라고 했다.
조씨, 윤씨, 그리고 하씨도 어떤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소확행을 찾아 나섰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퇴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큰마음을 먹고 퇴사를 결심하면 "너만 힘든 게 아니고, 다 그렇게 살았다" 같은 말을 듣는 게 현실이다.
행복을 찾아 나서는 청춘들의 도전이 그저 '정상' 경로에서 이탈한 쓸데없는 '잉여짓'으로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저서 '선망국의 시대'에서 "1990년대 청춘들의 잉여짓이 한류의 원천이 됐다"면서 "사회를 이만큼이나마 만든 건 잉여짓이라고 부르는 활동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잉여짓으로 보일 소확행은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의미다.
KPI뉴스 / 권라영·김혜란 기자 ry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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