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흐름 읽는 일 놓지 않다가 23일 94년 삶 마감
"나라대세는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지는 법"
권력자, 특히 대통령이라면 곱씹고 가슴깊이 새겨야
아흔을 넘긴 경제학자는 대뜸 "인민일보를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언젠가부터 배달이 끊겼다고 했다.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다.
2019년12월30일 오후 서울 행운동 자택을 찾았을 때 원로 경제학자 조순은 그렇게 '신문구독 민원'부터 했다. 매일 아침 파이낸셜타임스와 인민일보를 보는데, 인민일보가 어느날부터 안들어온다고 했다.
한달 뒤면 만 아흔둘이 되는 원로 경제학자는 그렇게 삶의 끝자락까지 시대 흐름을 읽고, 천하를 내다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양손에 지팡이가 쥐여졌지만 눈빛과 언변에선 연로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20년대 새로운 10년이 어떨지 물었다. 헛된 희망을 말하는 대신 독한 비판을 쏟아냈다. "남한도, 북한도 희망이 없다. 통일이라는 게 신뢰에서 생기는 건데, 이래서 무슨 통일이 되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지도자의 질을 걱정했다. "지도자의 질이 썩 좋았던 때가 별로 없는데, 특히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이 시대에 와서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지도자의 질이 올라가지 않으면 10년이 가도 나아질 게 없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특히 보수의 책임을 강조했다. "보수가 나라의 중심을 잡는 법인데, 그런 일을 하는 진짜 보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론으로, "우리는 처음부터 보수가 실패했다. 보수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보수세력이 중심을 잡고 보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단순히 이념에 사로잡혀 빨갱이 타령이나 하고 있다"고 했다.
조순 선생이 23일 오전 94년 삶을 마감했다. 걱정을 떨치지 못한 채 눈감았을 듯하다. 그가 지적한 지도자의 질, 보수의 책임, 빨갱이 타령은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문재인 정권의 무능과 오만 덕에 정권을 잡은 윤석열 정권은 뭐가 다른건지 알 수 없다. 내로남불에다 언행도 불일치다. 입으로는 민생을 걱정하면서 손발은 권력다툼으로 쉴 틈 없다.
비정상도 꼬리를 문다. 검찰총장은 공석인 채 검찰 인사가 폭주하고, 경찰 고위직 인사가 기습적으로 이뤄졌다가 번복되는 건 정상일 수 없다.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법치와도 거리가 멀다. 책임지는 보수라면 그럴 수 없다.
조순은 율곡 이이(1536~1584)의 문장을 즐겨 인용했다. '천하의 일은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고 나라의 대세는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진다'는 명언은 그중 하나다. 나이 서른에 당대 왕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올렸다는 직언으로, 천하는 잘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지 중간은 없다는 의미다.
권력쥔 자라면, 특히 대통령이라면 곱씹고, 또 곱씹어 가슴깊이 새겨야 할 명언이다.
조순은 서울대 교수,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초대 민선 서울시장, 한나라당 총재를 지냈다. 정·관·학계를 아우르는 광폭 스펙이다. 늘 이름 뒤에 어떤 직함을 붙여야 할지 난감했다.
"교수라고 해주세요. 원래 교수였으니."
더 이상 조 교수를 인터뷰할 수 없다. 천하대세를 내다보는 통찰도, 미래를 걱정하는 충정도 들을 수 없다. 한 시대가 저물었다. 조순 교수의 명복을 빈다.
KPI뉴스 / 류순열 편집국장 ryoos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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