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인연 맺은 이들의 사연들
일상을 벗어나 여행하듯 빠져드는 돋보이는 아포리즘
"잃어버린 시간은 늘 우리 안에 있는 …내 안의 보물섬"
나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멧돼지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다가 사살당했다는 걸 P씨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 …어제는 라디오에서 길을 건너려다 줄줄이 차에 치어 죽은 새끼 돼지들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시간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시간을 '사살'하는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 필연적으로 금방 잃어버리고 말 숙명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그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움을, 어찌 할까. 시간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면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상념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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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그림이 밥 먹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이라는 화가 황주리. 서사가 있는 그림을 지향해온 그가 새 소설을 펴냈다. [황주리 제공] |
화가 황주리가 프랑스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1871~1922)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배경으로 시간에 대한 연작소설 '마이 러브 프루스트'(휴먼앤북스)를 펴냈다. 끝까지 다 읽어본 이들이 드문 방대한 분량의 내용이 아니라, 이 작품의 표제가 던지는 이미지를 붙들었다.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지와는 무관하게 프루스트의 이 소설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다양하게 보여주는, '무해하고 따스한 사랑의 연대'에 방점을 찍었다.
앞뒤에 배치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시간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천진한 지적 장애아에게 시간은 오로지 현재에 머물러 있다. 그녀에게는 농구가 거의 전부인데, 밖에도 안 나가고 하루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며 노는, 길고 끝나지 않은 책을 쓴 작가 프루스트를 연구하는 사람이라 하여 '프루스트'라고 불리는 남자가 함께 농구를 보러 가고 싶은 유일한 대상이다.
멧돼지들이 먹을 게 없어 시내로 내려왔다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 멧돼지들은 그를 만나러 왔다가 사살당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전해주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프루스트씨를 찾아갔지만 그가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서야 했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동생을 떠올렸다는 황주리는 '나는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거나 낯선 외국인지 아니면 낯선 혹성에 가 있는 그가 어쩌면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시간을 죽이는 작자들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탐욕을 쌓아가면서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죠. 여기 주인공들은 탐욕스럽게 어떤 목적을 향해 걸어나가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무해하거나 혹은 자신과의 싸움을 향해 걸어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화로 만난 황주리는 "무해한 영혼들이 세상을 순화시키는 이야기"라고 이번 소설집을 규정했다. 그들의 판타지에 깔리는 바탕의 유전자가 후대에 널리 퍼져나가 조금이라도 세상이 순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카페 프루스트'의 화자가 좋아했던 플루티스트 여자는 유력한 남자의 정부로 살다가 딸 아이 하나 남긴 채 죽었다. 나는 다른 여자와 누워 있는 그 남자를 살해하는데, 소설 말미에 이르면 그 남자와 플루티스트와 나가 한 자리에 앉아 다정하게 와인을 마시는 장면을 연출한다. 말 그대로 '판타지'인 셈인데, 황주리의 판타지를 관통하는 기본 정조는 따스함과 사랑이다.

그림은 말 못하는 짐승 같다. 반려동물 같기도 하다. 말 없음으로 말을 전달하는 신기한 정물 같기도 하다. _ '카페 프루스트'
소설을 쓰는 일은 수를 놓는 일과 닮았다. 내게 좋은 소설은 촘촘히 놓아진 수를 천천히 감정이입을 하며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의 집이다. _ '프루스트 의자'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일가를 이룬 황주리의 소설 쓰기는 자연스러웠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그의 그림을 보고 소설을 청탁한 것이 그의 서사 욕구에 불을 붙였다고 했다. 황주리는 에세이스트로 호가 높은데, 그의 소설도 에세이에 서사를 얹는 스타일이다. 그의 말처럼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작가와 함께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하듯 그의 이야기와 문체에 감응할 수 있다. 그가 '그림'과 '소설'을 규정하는 문장들도 그러한 바탕에 실려 있다. 말 없음으로 수많은 말을 전하는 '그림'은 그에게 '밥을 먹는 일'이고, 수를 놓듯 찬찬히 자신의 호흡을 불어넣는 소설은 '그리움과 함께 사는 법'이라고 그는 기술한다.
'마담 푸르스트'의 남편은 프랑스인이고 화가다. 남편은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고 '나'는 프랑스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나의 꿈은 프루스트의 방대한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지금껏 없었던 지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기실 이런 진술처럼 황주리의 소설이야말로 프루스트의 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잃어버린 시간'들을 그의 감수성으로 번역해내는 일일 터이다. 그가 그려온 그림들은 줄곧 '잃어버린 시간'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많은 그림과 오브제들로 가득 찬 창고를 뒤지다 보면 보석 같은 추억들을 수시로 건져올리는데, 하물며 내 안의 잃어버린 시간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건 열정이다. 살려는, 이루려는, 되찾으려는.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늘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시간은 내 안의 보물섬이다. _ '마담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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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주리의 '잃어버린 시간'. 그는 내 안을 뒤적여보면 잃어버린, 무수한 보물 같은 시간들이 있다고 말한다. [황주리 제공] |
'프루스트 의자'에서는 아내가 주워온 짝퉁 의자에 앉아서 남편이 소설을 쓴다. 아내는 '하루종일 앉아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글을 쓰는' 남편에게 '우리 참 사랑했는데 우리 사이에 남은 건 프루스트 의자, 그것도 짝퉁 의자 하나인 것 같다'면서 '우리 여기서 그만 하자'고 말한다. 쓸쓸하게 헤어질 기로에 놓인 부부 이야기는 '프루스트 책방'에서도 반복되거니와, '잃어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잃어버릴 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모순을 살아가는 셈이다.
"그것이 시간의 정체인 것 같아요.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하지 않아야 되는데 나중에 또 그걸 찾으러 가고, 잃어버리고 또 찾고, 자꾸 잃어버리고… 그 시간의 정체라는 게 그렇게 상처 입고 결론이 나지 않는 몇 겹으로 꼬여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고 봐야겠죠."
황주리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대개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얻어 과장되거나 변형된 상상의 인물들"이라며 "이 책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에 대한 뜬금없는 명상,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여행기"라고 서문에 밝혔다.
위에 언급한 단편들 외에도 '하나는 작고 둘은 모자라고 셋은 완벽하다'는 '프루스트 헤어', 소수자의 아픔을 녹여낸 '프루스트, 프루스트'를 거쳐 프롤로그와 짝을 이루는 말미의 '에필로그'에 이르면, 프루스트 씨는 '길쭉 하얀 청년' 뱀파이어로 변신한다.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영원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일까. 황주리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삼았다"면서 "그들처럼 무해한 영혼들이 연대해 세상을 순화시켜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거듭 희망했다. 다독과 명상으로 길어올린 황주리 소설의 아포리즘.
-신은 없다. 만일 있다고 치더라도 자식을 불타는 전쟁터에 내다 버린 부모를 닮은, 그런 신은 없어도 무방하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뗏목을 붙들고 떠내려간다. 어느새 뗏목도 사라지고 마냥 떠내려간다. 우울증이란 자신에게 아니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형선고를 잊지 못하는 병이다.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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