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무대에서 12년 동안 쌓인 고뇌의 흔적과 반성, 기도
적개심과 증오로 혐오하고 조롱하는 어둠의 시간 성찰
"영성 없는 진보는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사실 되새겨"
도종환 시인이 8년 만에 새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을 펴냈다. 국회에 입성한 지 12년만에 다시 오롯이 시인의 자리로 돌아오고, 등단 40년을 맞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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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정오에서 가장 먼 어둠의 시간을 성찰한 도종환 시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그는 일찍이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밀리언셀러 시인으로 각광받았고, 충북국어교사모임 회장으로 활동하다 투옥되기도 했고, 병을 얻어 산중에서 5년 동안 홀로 지내기도 했으며,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도 역임했던 문단의 중후한 시인이다. 그가 19대 국회 비례대표(민주통합당)로 추천돼 정치판에 들어간 이래, 20~21대 국회에서는 선거로 선출돼 의원직을 수행한 뒤 이제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 형국이다.
이번 시집에는 나무와 꽃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이 전장 같은 정치판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보고와 반성, 기원이 '가을 물' 같은 문장으로 흘러간다. 일찍이 까뮈가 말한 '정오'란 가장 환하고 균형잡힌 시간을 의미하거니와, 시인은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이라고 인식한다.
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 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면죄는 없습니다/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_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부분
새 시집 출간을 계기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정오는 가장 따뜻하고 밝은 시간, 생명을 가진 것들이 가장 왕성하게 생육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장 어둡고 살벌한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다"면서 "이 거칠고 사나운 죽음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뇌하는 흔적들을 이번 시집에 담았다"고 서두에 밝혔다. 그는 이어 "어둠 속에도 잘 들여다 보면 어둠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별도 있고 달도 있다"면서 "이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성찰하는 사람,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시인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왜 지금 시대를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으로 보는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다. 특히 경제 문제의 양극화가 그러한데 동시에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문제도 정서의 양극화이다. 모두 극단에 서 있다. 양 극단에 서서 확신에 넘쳐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확인해 주는 말들만 들으려고 하고,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공감하면서 반경을 넓히려고 하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배척하고 혐오하고 조롱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되면 거의 정신적으로는 내전 상태까지 가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머리에는 적개심과 증오만 가득하고 혐오와 조롱의 언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삶이 얼마나 황폐한 것인지, 누군가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극단에서 돌아와야 한다고, 내려서야 한다고, 성찰할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에 살면서 내면의 짐승들을 꺼내놓고 점점 더 거칠고 사나운 삶을 살아갈 텐데 그 끝은 결국 멸망일 것이다."

오로지 격정만을 앞세우다 파탄에 이르렀다고/ 저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옳게 공부한 이들이 집권을 하고/ 수십년의 시간과 기회를 주었는데도/ 나라가 괴멸되다시피 한 까닭을/ 선생께 다시 묻고 싶은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늘이 몇백년 만에 선생 같은 분을 내시고/ 사림이 전면에 나서 정치를 하였는데/ 어찌하여 나라는 가장 참혹하였는지/ 후학들은 어찌하여 뒤늦은 후회만을/ 징비(懲毖)의 언어로 뼈에 새겨 남기는지/ 어찌하여 똑똑하고 젊고 패기 있는 선비들이 집권한 뒤/ 나라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 _ '사림(士林)' 부분
-12년 동안 쌓인 고뇌를 압축한 시 한편을 언급한다면.
"오랜만에 잡은 권력을 선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사림'이라는 시에 담았다. 권력을 의롭게 쓰려고 했던 사람들, 권력을 따뜻하게 쓰려고 했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전권을 쥐고 자기들이 품었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작고 사소한 차이로 감정적 대립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전쟁의 위기를 앞두고도 뜻을 같이 모으지 않고 절대 동의해 주지 않아서 18년간 정치하던 율곡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결국 징비록으로 후회만 남겼다. 야당이, 재야가 오랜만에 집권해서 정말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분열해서 날리는 양상과 흡사하다."
라일락은 왜 거기 있을까// 사월이/ 간절하게 불러서/ 거기 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_ '라일락' 전문
-정치를 하면서 어떻게 꾸준히 시를 쓸 수 있었는가.
"정치 한복판에서 일을 하면서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질문을 저에게 스스로 계속 했다. 선거를 통해서 주어진 기간 동안 제 역할을 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그 권한을 어떻게 따뜻하고 의롭게 쓸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더욱이 시인이었기 때문에 시의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덜 망가진 상태에서 어떻게 주어진 역할을 다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굉장히 깊었다. 영혼 있는 정치를 하겠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정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만, 극작가였던 체코 대통령 하벨처럼 '비정치의 정치' '불가능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논산훈련소에서도, 감옥에서도 썼는데 의원실에서 못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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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종환 시인은 "성찰 없는 용기는 사람들의 열정을 얼마든지 광기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도종환 시인은 올봄 총선 상황과 무관하게 지난 8년 동안 써왔던 시들을 지난해 출판사에 넘긴 상태였다. 그간의 정치판 삶을 요약하는 보고 성격의 시편 '심고'는, 동학에서 한울님께 보고하는 형식을 빌려 전개된다.
무엇 하다 왔는고?/ 시 쓰다 왔습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좀 바꾸었나?/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습니다/ 깨끗해졌다 싶으면/ 흙바람 쓰레기 다시 몰려오곤 했습니다/ 수천년 동안 당신께서 못 바꾼 세상을/ 저희가 십여년에 어찌 바꾸겠습니까/ 세상일에 왜 간섭하고 싶어 했노?/ 혹한이 깊어지면 봄 햇살로 간섭하고 싶어 하시듯/ 땅이 메마르고 갈라지면 빗줄기 보내/ 세상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시듯/ 저도 그리하였을 뿐입니다 _ '심고(心告)' 부분
-정치와 문학의 길을 고민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문학을 하다 말고 정치를 한 거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는가 물으면 마당만 좀 쓸다가 왔다고 대답하는 시를 썼다. 마당을 쓸다 조금 깨끗해지는가 싶으면 다시 쓰레기가 쌓이지만, 후배들이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권장하겠다. 문화 예술 영역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 꼭 필요하다. 21만여 명의 예술인들이 공연과 촬영과 전시가 없을 때도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술인 고용보험'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것에 보람을 느낀다. 정치권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리나 권력을 탐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권한을 공정하고 따뜻하게 쓰기 위해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도종환 시인은 "지난해에는 출판, 문학, 서점, 도서관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면서 "문학이나 영화, 출판 쪽은 좌파가 장악한 영역이라는 편견은 잘못된 진단이며 문화예술 쪽 예산을 대책 없이 삭감하는 건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지금이 가장 밝은 희망찬 시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깜깜한 시간이기도 하다"면서 "진보라고 해서 옳은 길로 가는 것만은 아니어서 영성 없는 진보는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정신차리게 자꾸 얘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의 이런 복수는 어떤가.
지난해 늦가을 마디마디를 절단당한/ 가로수 잘린 팔뚝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연둣빛 잎들이/ 솟아나고 있다/ 고통을 고통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극단을 극단으로 되돌려주려 하지 말자/ 여전히 푸르게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수다 _ '흐린 날' 부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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