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개운설 관련 무학·정도전 얘기, 허구 가능성 높다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6-04-07 16:40:52
[김덕련의 역사산책 49] 관악산 화기 이야기의 이면
20~30대 중심으로 관악산 열풍…계기는 역술가 발언
열풍 관련 '무학·정도전 논쟁' 사실로 단정한 기사 다수
궁궐 전문가 "후대에 꾸며낸 허구…전설로 웃어넘겨야"
풍수지리설 지나치게 부각하는 비합리적 접근 경계해야

서울과 경기 과천·안양에 걸쳐 있는 관악산을 찾는 사람이 근래 20~30대를 중심으로 급증했다. 계기는 1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역술가의 발언이었다. 운이 안 풀릴 때는 정기가 좋은 관악산에 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관악산에 오르면 운이 트인다(개운, 開運)'는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렸다.

관악산 열풍이 불자 여러 매체에서 개운설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풍수지리설에서 이 산을 화기(火氣) 즉 불의 기운이 강한 곳으로 여긴다는 것이 대다수 기사에서 거론됐다. 그와 관련해 주요하게 언급된 사례 중 하나가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논쟁이다. 

 

▲ 관악산. [서울 공식 관광 정보 웹 사이트 'Visit Seoul' 화면 갈무리]

 

내용은 이렇다. 조선 초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진산(鎭山), 백악(북악산)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삼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궁궐 정문은 동쪽을 바라보게 된다. 정도전이 제왕은 남쪽을 향해 앉아 다스렸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건국 200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경복궁이 불타 없어진 일과 연결된다. 무학대사 말을 따르지 않아 경복궁이 화기가 제어되지 않은 남쪽의 관악산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결과 화마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그에 더해, 조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여러 번 벌어진 것도 무학대사 예언이 적중한 근거로 제시된다.

관악산 열풍을 다룬 기사 중 상당수는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서술했다. 여러모로 부적절한 접근 방식이다. 궁궐 전문가인 홍순민 교수 논문('왕십리 경복궁 – 왕조 창업과 5대 궁궐', 1996)과 무학대사의 활동을 연구한 이익주 교수 논문('무학 자초의 정치 활동에 대한 재검토 – 한양 천도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2021)을 매개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짚어볼 것은 무학대사·정도전 논쟁 이야기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 논쟁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공식 편찬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 출처는 차천로(1556~1615)라는 사람이 지은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라는 책이다.

차천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벼슬이 높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글재주로 이름을 알렸다. 고향 사람이 과거를 볼 때 글을 대신 지어줘 합격시킨 일이 들통나서 귀양을 갔다가 '글재주가 좋다'는 이유로 풀려난 적도 있다. '오산설림초고'는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한 항간의 속설을 주로 수집해놓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홍 교수는 무학대사·정도전 논쟁 등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무학대사 역할을 강조하는 여러 이야기에 대해 "모두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후대에 꾸며낸 허구"라고 지적했다. 이야기들의 근거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궁궐과 관련하여 무학대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저 전설 정도로 웃어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두 번째로 짚어볼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전해지는 무학대사 관련 이야기 중 상당수가 특정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 수도를 정하는 과정에서 무학대사가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대한 의견을 묻자, 무학대사는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라고 하고는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십시오"라고 답했다. 당대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무학대사 역할은 그 정도다.

1405년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는 실록에서 200년 가까이 무학대사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무학대사 이름이 실록에 다시 나타나고, 무학대사의 선견지명에 방점을 찍는 차천로 책 등이 등장한다.

이 교수는 조선 후기에 다시 나타난 무학대사 관련 기록들이 "초기와는 다르게 그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내용이 바뀌었다"는 데 주목한다. 여러 국정 현안 결정 과정에서 무학대사 비중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조선 전기에는 없다가 후대에 갑자기 등장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조선 후기에 (그 이전에는) 없던 사실을 만들어가면서 자초(무학대사)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와 같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만들어진 이야기를 근거로 조선 초 한양 천도 과정에서 자초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비학문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 관광객들이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경내를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세 번째로 짚어볼 것은 무학대사·정도전 논쟁 이야기의 정치적 효과 문제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임진왜란을 비롯한 국가 위기는 건국 후 도읍을 잘못 잡은 데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재난'이 된다. 이는 모든 죄를 정도전에게 뒤집어씌우는 논리와 연결된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초고'에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800년 뒤 일을 미리 알고 딱딱 맞혔다며 무학대사 또한 신승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정도전이 무학대사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마음, 즉 나라를 뺏으려는 마음이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을 역적 취급하며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것이다.

조선 왕실을 비롯한 권력 핵심층이 접했다면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법한 궤변이다. 권력 핵심층 기준으로 보면, 임진왜란 같은 위기를 초래하고 심화시킨 것은 정치를 잘못한 자신들 책임이 아니라고 발을 뺄 수 있게 해주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의 역할과 선견지명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이유를 탐구할 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다.

네 번째로 짚어볼 것은 비합리적 접근 방식의 문제점이다. 무학대사·정도전 논쟁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설령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논쟁 결과 때문에 20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경복궁이 불탔다고 여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합리적으로,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등의 비합리적 방식으로 역사와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관악산 화기 이야기의 경우 올해만이 아니라 2008년에도 그런 방식으로 동원된 적이 있다. 2008년에는 숭례문 방화 사건,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화재, 촛불 시위가 관악산 화기를 다스리지 못해 생긴 일이라는 괴담이 돌았다. 하지만 이러한 비합리적 접근 방식은 역사적 사실 파악에도, 문제의 해법 도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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