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윤희순·정현숙…기억해야 할 어머니 항일 투사들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6-03-05 16:51:27
[김덕련의 역사산책 46] 화려하지 않은 헌신의 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삶 재조명 영상 제작·공개돼
조선총독 등 처단 계획…영화 '암살' 여주인공 모델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 3대 40년 항일 투쟁
정현숙은 남편 오광선, 두 딸, 맏사위까지 독립유공자

1933년 2월 27일 일제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 도시 하얼빈 교외. 한 노파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중국인 거지 차림이던 이 61세 여성은 사실 한국인이었다. 관동군 사령관이자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 권총 등을 몰래 지니고 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창춘)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여성은 굴하지 않았다. 그해 8월 단식 투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5일 후 세상을 떠났다. 자기 돈 200원을 훗날 한국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과 손자가 자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교육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독립군의 어머니', '여자 안중근'으로 불린 항일 투사 남자현(1872~1933) 이야기다. 이번 107주년 3·1절을 맞아 서경덕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남자현의 삶을 재조명하는 영상을 제작·공개했다. 반가운 일이다. 

 

▲ 서경덕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제작·공개한 영상 '시대의 틀을 깬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의 한 장면. 이미지 우측 하단에 '화면 자료: AI'로 표기돼 있다. [서경덕·송혜교 제작 유튜브 영상 갈무리]

  

남자현의 삶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두 가지만 살펴보자. 하나는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당시 47세는 손주를 여럿 둬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런 나이에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자현은 24세이던 1896년 남편을 잃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해 봉기한 을미의병의 일원이던 남편은 전투 중 목숨을 잃었다. 임신 중이던 남자현은 유복자를 낳아 기르며 시부모를 봉양했다. 그렇게 23년이 지난 1919년 47세의 남자현은 3·1운동에 참여한 후 이제는 장성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투신 시기는 늦었지만 활동은 열정적이고 전방위적이었다. 여성 교육 단체를 곳곳에 만들고, 대립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만주 각지를 오갔다. 일본의 만주 침략 불법성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에 오자,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한국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와 함께 조사단에 보냈다.

다른 하나는 직접 무기를 들고 의열 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보여준 셈인데,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망명 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에서 다친 독립군 간호를 맡은 데서도 드러나듯이, 초기에는 남성 독립군을 챙기며 뒷받침하는 역할이 주로 부여됐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달라진다. 1925년 동지들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계획을 세운 53세의 남자현은 권총과 탄환을 지니고 서울에 잠입했다.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해 빈손으로 서울을 떠나야 했지만, 남성 독립군 간호와는 질적으로 다른 역할을 맡은 점이 눈에 띈다.

1933년 관동군 사령관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 등을 지니고 길을 나선 것은 1925년 조선총독 처단을 위해 직접 나선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자현은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로 여겨진다. 영화 속 인물은 안옥윤으로, 배우 전지현이 연기했다.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항일 투쟁을 했던 사람은 남자현 이외에도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윤희순(1860~1935)과 정현숙(1900~1992)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윤희순은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로 여겨진다. 1895년 을미의병 중 강원도 춘천 일대에서 봉기한 부대에 동참한 시아버지의 활동을 도운 것을 시작으로 항일 투쟁에 발을 들였다. 어머니로서,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로서 의병들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다. 또한 의병 활동을 독려하는 8편의 노래를 만들어 항전 의식을 고취했다.

다시 의병 활동에 불이 붙은 1907~1908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인근 지역 여성 30여 명을 의병으로 조직해 군자금을 모아 놋쇠와 구리를 사서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했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의병 재건을 도모했다. 1913년 시아버지, 1915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한 두 아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갔다. 1935년에는 큰아들이 일본 경찰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윤희순도 세상을 떠나며 3대에 걸친 40년 항일 투쟁을 마무리했다.

 

▲ 오광선(왼쪽)과 정현숙 부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정현숙은 독립운동가 집안의 어머니이자 항일 투사였다. 정현숙 본인은 물론 남편, 두 딸, 맏사위까지 독립유공자다. 남편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1920년대 만주의 여러 독립군 전투 참여부터 1940년대 광복군 활동까지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정현숙은 의병 출신인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집안을 지키고, 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등을 뒷바라지하며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대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자식은 부모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어릴 때부터 부모의 독립운동을 지켜본 두 딸은 자연스레 광복군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 둘째 딸 오희옥은 2024년 별세할 때까지 '마지막 여성 광복군'으로 불리며 독립운동 역사를 생생히 증언했다.

남자현, 윤희순, 정현숙 같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유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전통적 여성상에 가까운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 오랫동안 살아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구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 '모던 걸(modern girl)' 또는 '맑스 걸(Marx girl)'로 불린 신여성 출신 독립운동가들과는 삶의 결이 달랐다.

보살핌, 뒷바라지 같은 이들의 화려하지 않은 헌신이 없었다면 독립운동 세력이 투쟁을 이어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기를 드는 남자현 같은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전통적 여성상을 넘어서는 모습도 나타났다.

물론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독립운동 참여 집안의 여성들을 살펴보면 직접 독립운동가로 나서기보다는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아내로서 남성을 후원하는 역할에 머문 경우가 적지 않다.

학계에서는 당시 남성 독립운동가 중 상당수가 가부장적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여성 역시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유지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과 무관치 않은 모습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3·8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함께 기억해야 할 비판이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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