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에게 격려금 준 판사와 옹호한 검사는 반성했을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6-04-01 16:40:40
[김덕련의 역사산책 48] 고문 기술자와 합작한 법 기술자
부추긴 국가 권력, 협조한 판검사도 고문에 책임
이근안, '대법관·부장판사에게 격려금 받아' 진술
책임지지 않고 승승장구한 법 기술자 문제 직시해야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지난달 25일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매체에서 이근안 관련 보도를 했다. 이근안이 자행한 고문 사례, 이근안 사망에 대한 일부 피해자 측 반응, 정부의 뒤늦은 상훈 박탈 추진 움직임 등을 다룬 기사가 대부분이다.

이 대목에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이근안이라는 한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다른 각도에서 사안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점이다. 고문 문제에 책임이 있는 건 이근안처럼 직접 고문을 자행한 사람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근안 전 목사가 2012년 12월 14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한 뷔페에서 열린 자서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에서 취재진을 향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고문을 허가하고 부추긴 국가 권력의 책임 문제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독재 정권 시기에 국가 권력은 이근안 같은 사람들이 마음껏 고문할 수 있게 해줬다. 특진과 격려금을 내걸고 고문을 조장했다. 간첩 사건 등을 다수 조작하는 '성과'를 거둔 고문 기술자들에게는 훈포장과 표창도 안겨줬다.

특진, 격려금, 훈포장과 표창은 이근안 같은 사람들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 요소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문 기술자 본인이 부당한 특혜를 누리는 것을 넘어, 보국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인정되면 자녀까지 취업, 교육 등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에서 고문 기술자들은 민주화 운동가는 물론 평범한 시민까지 먹잇감으로 삼아 각종 사건을 조작하며 실적을 쌓았다. 그리고 그 윗선에는 조작된 사건들을 독재 정권 유지에 활용하는 극우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 권력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고문 기술자들과 합작한 법 기술자들의 책임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고문과 사건 조작은 판검사의 적극적 협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단법인 진실의힘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로 2018년에 작성한 보고서인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실태 조사 연구'에 실린 이근안 관련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진실의힘은 독재 정권 시절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됐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 과정을 함께한 이들과 뜻을 모아 만든 단체다.

함주명은 1983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40일 넘게 물고문, 전기 고문 등을 당하며 간첩으로 조작됐다.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이라고 검사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검사는 함주명의 호소를 조서에 반영하지 않고, 이근안이 고문으로 조작한 수사 기록을 공소장에 옮겨 썼다.

함주명이 법정에서도 고문 피해를 호소하자 검사는 이근안에게 고문을 부인할 기회를 줬다. 이근안은 함주명이 냉·온방 시설, 욕조, 수세식 변소 등이 갖춰진 안락한 방에서 수사 요원들이 먹고 피우는 것보다 더 좋은 음식과 담배를 대접받으며 지냈고, 고문은 없었다고 허위 증언했다. 판사는 이근안의 뻔한 거짓 주장과 고문 수사 기록을 받아들여 함주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고문 기술자와 법 기술자가 한통속이 돼 주권자의 삶을 짓밟는 이런 모습은 함주명 사건에서만 나타난 게 아니었다. 경찰,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전신), 보안사 등에서 발생한 숱한 고문·조작 사건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이다. 피해자들 사이에서 '고문한 수사관보다 무죄임을 뻔히 알면서도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한 검사와 판사가 더 밉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고문·조작 사건에 적극 협조한 상당수 검사와 달리 판사는 대개 진실을 외면하며 소극적으로 협조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고문 기술자에게 적잖은 돈까지 주며 치하한 판사도 있었다.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그 실체가 드러나자 도피했다. 11년이나 잠적했다가 1999년 자수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검찰 조사를 받는데, 그 진술서에 이근안이 함주명 사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내용이 나온다.

"실황 조사를 잘했다 하여 '작성 요령을 책으로 작성하여 보급하는 것이 좋겠다'며 존함은 모르나 박처원 실장을 통해 어느 대법관님으로부터 격려금 100만 원을 받은 바 있다." 박처원은 전두환 정권 때 남영동 대공분실을 총괄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은폐 사건 등에 관여한 인물이다.

이근안에게 격려금을 안긴 판사는 이 대법관만이 아니었다. 이근안은 1984년 이장형이라는 인물을 고문해 또 다른 간첩 사건을 조작했는데, 이 사건과 관련해 한 부장판사로부터 격려금을 받았다는 진술도 했다.

 

▲ 이근안 일당이 1985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주화 운동가 김근태를 고문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남영동 1985'(2012년 작)의 한 장면. [씨너스엔터테인먼트㈜, (주)엣나인필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도피해야 했던 이근안과 달리 법 기술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고문·조작 사건을 담당한 판검사 중 국회의원, 행정부 고위 공직자로 변신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해당 사건 피해자들에게는 그런 현실을 지켜봐야 하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다.

이근안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도피 시기에는 '저들은 놔두고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생각이 들었을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수 후 목사가 된 이근안이 자신이 과거에 한 일은 "애국", "일종의 예술"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법 기술자들이 계속 잘나가는 현실, 고문을 부추겼던 세력이 여전히 막강한 정치 상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고문 기술자들과 합작한 법 기술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과정을 거쳤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검찰과 사법부라는 조직 차원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성찰하는 정도가 지금보다는 분명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없었고, 오늘날 검찰과 사법부는 다수 시민에게 핵심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고문 기술자 사안은 법 기술자 그리고 고문을 부추긴 국가 권력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근안 사망 관련 문제를 바라볼 때에도 그런 부분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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