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옹기장이 중 천주교 관련 집안 출신 다수
박해 계기로 시작된 천주교-옹기 특별한 동행
천주교인 숨어 산 교우촌 상당수에서 옹기 제작
김수환 추기경은 옹기장수 아들…아호 '옹기'
국가유산청이 지난 2일 방춘웅 씨와 이학수 씨를 국가무형유산 옹기장 보유자로 인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83세의 방 씨는 충남, 71세의 이 씨는 전남에서 수십 년 전부터 흙으로 독과 항아리 등을 만드는 옹기장이로 활동해왔다.
국가유산청 보도자료와 이를 바탕으로 한 기사들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두 사람 중 방 씨의 옹기 인생은 천주교와 관련돼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방 씨 증조부가 옹기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옹기장이로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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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으로 옹기를 빚고 있는 방춘웅 옹기장. [홍성문화원 유튜브 화면 갈무리] |
이는 방 씨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전국의 옹기장이 내력을 살펴보면 천주교와 관련된 집안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다룬 1985년 논문에 따르면 당시 수도권 옹기 공방의 90%를 천주교 신자가 운영했고 충청도에서는 80%, 전라도와 강원도에서는 50%가 그러했다.
천주교와 옹기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관계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야기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천주교의 역사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됐다. 외국 선교사가 오기도 전에 조선인들이 서학을 연구해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세계적으로 독특한 사례다.
그러나 이들의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당시 사회 질서와 공존하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등이 생겼다.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금압했다. 천주교 박해 사건이 19세기 후반까지 여러 차례 발생했다.
많은 천주교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 배교자도 나타났다. 이와 달리 박해를 피해 달아나는 데 성공한 천주교인도 적지 않았다. 몸을 피한 이들은 전국 각지에 숨어들어 자신들만의 생활 공동체이자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교인들이 모여 산다 하여 교우촌이라 불렸다.
교우촌의 천주교인들이 생계를 위해 택한 대표적인 업종이 바로 옹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다수의 교우촌에서 옹기를 굽는 가마를 설치하고 옹기를 제작했다. 그렇게 만든 옹기를 가지고 다른 지역을 다니며 파는 행상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옹기 제작을 생업으로 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옹기 작업의 여러 특성이 교우촌의 천주교인들에게 필요했던 요소들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양질의 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땔감인 나무를 쉽게, 많이 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 때문에 옹기 가마는 인적이 드문 산, 그중에서도 산꼭대기보다는 운반과 이동이 편리한 산자락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관청의 추적을 늘 의식해야 했고 발각되면 다시 달아나야 했던 천주교인들에게 적합한 입지 조건이다.
옹기장이에 대한 천대가 역설적으로 천주교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면도 있었다. 양반 출신 천주교인이 천하고 존재감이 별로 없다고 여겨지는 옹기장이로 신분을 바꿔 살아가면 잡힐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옹기장이 거주지가 대개 주변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형성돼 이목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천대와 무관치 않았다.
옹기 제작은 다른 일에 비해 시설 비용 등 초기 자본이 덜 드는 업종이기도 했다. 옹기 행상을 다니며 다른 지역 교우촌과 자연스럽게 소식을 주고받고, 박해 때 흩어진 가족 등의 행방을 수소문할 수도 있었다. 또한 외진 곳에 자리했고 널찍한 옹기 제작 공간은 은밀한 공동 예배 장소로 적격이었다.
이런 여러 요소가 작용해 교우촌의 상당수 천주교인이 옹기를 만들고 팔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일은 고되었고, 경제적으로 거의 최하층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인근 마을 농가 아이들이 훨씬 연상인 옹기장이를 "자네"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심했던 천대도 감수해야 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천주교인들은 신앙을 지키면서 옹기를 만들고 팔며 버텼다. 정성을 다해 옹기를 구워 내듯이 아이들을 길러 내며 대를 이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자라나 성직자가 된 이들도 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그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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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홈페이지'에는 김 추기경과 옹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질박한 성품에 세상을 너그럽게 품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옹기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홈페이지 갈무리] |
김 추기경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추기경의 부친은 옹기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부친 사망 후에는 추기경의 모친이 옹기를 팔고 포목 행상을 했다. 모친은 아들에게 신부(神父)가 될 것을 권했고, 그것은 소년 김수환이 성직자의 길을 걷는 주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옹기는 추기경 김수환이라는 인물이 세상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숨은 주역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김 추기경이 아호를 '옹기'로 정한 데서도 옹기가 추기경의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느낄 수 있다.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 '옹기'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은 소외된 이들을 넉넉하게 품어줬다. 민주주의를 위해 고투하다 쫓겨온 이들도 받아줬다. 박해를 계기로 시작된 천주교와 옹기의 특별한 동행은 그렇게 한국 현대사에서도 빛을 발했다.
△주요 참조=원재연 논문(「천주교도 옹기장이의 유랑과 은둔」, 『한국사연구』 164, 2014), 이창언 논문(「옹기교우촌의 분포와 특성 – 경상북도 칠곡지역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42, 2009), 민경은 논문(「옹기점 운영의 생산·분배적 조건과 신앙풍속」, 『민속학연구』 23, 2008)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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