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와 '또 다른 김구 암살 공작' 밀정의 기괴한 합작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5-07-21 15:58:41
[김덕련의 역사산책 22] 박기서 별세로 돌아본 안두희
이름 널리 알려졌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
미국 측 실리 보고서 '안두희, 백의사 암살단원'
1959년 일본 건너가 북송 선박 폭침 공작 시도
함께 공작한 위혜림은 일제 강점기 밀정 출신

지난 10일 다수 언론이 한 전직 버스 기사의 부음을 전했다. 고인 이름은 박기서. 1996년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타살하고 자수한 박씨는 1998년 사면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났다. 운전 등으로 생업을 이어가며 역사 왜곡 규탄 활동에 동참했다.

박씨의 별세 소식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또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박씨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바로 안두희다. 

 

▲ 안두희 피살 소식을 보도한 경향신문 1996년 10월 24일 자 1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 사이에 38선 이남에서 주요 정치인 네 명이 은밀하게 살해됐다. 1945년 12월 송진우를 시작으로 1947년 7월 여운형과 12월 장덕수, 1949년 6월에는 김구가 암살됐다.


안두희는 네 사건의 암살범 가운데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김구 암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것과 닮은꼴이다.

안두희는 1917년 평북 용천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행적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1941년경 일본 유학을 접고 중국에 건너가 1945년 1월 귀국 전까지 각지를 유랑하는데, 중국에서 일본군 밀정 노릇을 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광복 후 행적의 상당 부분도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안두희는 1947년 월남 직후 극우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 군에 입대하고 이듬해 김구를 죽였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2001년 발굴된 '실리 보고서'에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다.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던 실리 소령은 김구 피살 3일 후 작성한 이 보고서에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 정보원 및 요원으로 활동했다', '백의사 내 암살 담당 기구의 구성원이었다'고 썼다.

안두희가 백색 테러를 일삼은 비밀 조직인 백의사의 암살단원이었고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다. 사실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일긴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보고서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김구 암살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범행 후 행적도 눈길을 끈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 후 고작 1년 만에 풀려나 군에 복귀하는 특별 대우를 받는다. 군을 떠나선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차려 풍족하게 살았다. 군부를 위시한 정권 차원의 비호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1950년대 안두희의 행적으로 대개 이 정도가 주요하게 거론된다. 그러나 이도 전부가 아니었다. 안두희는 1950년대 초중반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 깡패 조직을 이끈 인물로 지목된다. 1959년에는 또 다른 정치 공작을 위해 일본에 파견됐다.

목표는 재일 조선인 북송 사업 저지였다.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안두희의 계획은 북한 측이 재일 조선인 북송을 위해 보낸 소련 선박을 일본 영해에서 폭침시키는 것이었다. 커다란 외교 문제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공작이었는데,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안두희는 계획을 포기했다.

주목할 사항 중 하나는 일본에서 함께 공작을 전개한 이들의 면면이다. 안두희의 주요 공작 파트너는 이 대통령이 일본에서 운영한 사설 기관으로 얘기되는 '경무대기관'이라는 곳에서 활동한 한국인 위혜림과 일본인 나카지마였다.

나카지마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에서 일본 특무 기관원으로 활동했다. 1891년생인 위혜림은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 기관인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구 암살 공작에 관여한 인물이기도 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 4월 윤봉길 의거로 타격을 입은 일제는 이를 지휘한 김구를 죽이려 여러 차례 공작을 전개했다. 그중 1935년에 전개된 암살 공작에서 밀정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위혜림이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와 또 다른 김구 암살 공작에서 밀정이었던 위혜림이 합작하는 기괴한 풍경이었다. 북송 사업 저지 공작 실행자로 안두희를 택했다는 것은 이승만 정권의 정보 당국이 안두희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두희에게 이승만 집권기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김구 쪽은 정반대 상황이었다. 암살 진상을 밝히는 것은 고사하고 추모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형사들이 김구 묘소 길목에서 참배객 신원을 조사하며 감시했다. 심지어 부친 묘소를 찾은 김구 아들 김신에게까지 그렇게 했다.

안두희 전성시대는 1960년 4월혁명으로 막을 내린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각계에서 김구 암살 등 각종 의혹 사건의 진상 규명 요구가 터져 나왔다. 안두희는 도망자로 전락하게 된다.

4월혁명이 한국 현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느끼게 하는 장면 중 하나다. 그러한 4월혁명을 깎아내리고 이승만 집권기를 터무니없이 미화하려는 사회 일각의 퇴행적 흐름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할 때다.

△주요 참조=정병준 논문(「공작원 안두희와 그의 시대」, 『역사비평』 69, 2004), 윤대원 책(『제국의 암살자들: 김구 암살 공작의 전말』, 태학사, 2022)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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