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선거와 닮았다' 지적 나오는 축구협회장 간선제
최초 체육관 선거, 1972년 유신 쿠데타 후 제8대 대선
1980년까지 제9~11대 대통령도 체육관에서 사실상 옹립
그 후 좁은 의미 체육관 선거→선거인단 간선제로 변형
6월항쟁으로 막 내린 간선제…축구계에서도 변할지 주목
근래 체육관 선거라는 표현이 언론 보도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대한축구협회 쇄신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생긴 현상이다.
현행 축구협회장 선출 방식은 간선제다. 축구협회 정관에는 100명에서 300명 사이의 선거인단이 회장을 선출하도록 돼 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지난해 2월 선거 당시 선거인단은 192명이었다. 이때 정몽규 전 회장은 투표 참가자 183명 중 156명의 몰표(득표율 85.2%)를 얻어 4연임에 성공했다(2위 허정무 15표, 3위 신문선 11표, 무효 1표).
축구협회에 등록된 인원은 10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선거인단 규모는 그것의 0.3%에도 못 미친다. 축구인 다수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구조가 독재 정권 시절 체육관 선거와 닮았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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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 모습. [뉴시스] |
체육관 선거는 1970~1980년대 독재 정권 시절 시행된 대통령 선출 방식을 세간에서 지칭한 용어다. 말만 선거일 뿐 옹립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행사가 진행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명목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세간에서 '통대'로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독재 체제를 만들기 위해 1972년 10월 17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새롭게 등장한 기구다.
유신 헌법에는 '통대'가 주권적 수임 기구라고 명시돼 있었다. '통대'를 그렇게 규정한 것은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 원리 부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통대'는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을 권한도 갖고 있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통대'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최초의 체육관 선거인 제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입후보자는 박정희 한 사람뿐이었다. 박정희 이외에는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기 어렵도록 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어놓은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군대를 동원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최고 권력자와 맞서 후보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박 후보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전원 참여한 투표에서 2357표를 얻어 당선됐다. 득표율은 99.9%였다. 나머지 2표는 무효표였다. 처음부터 대통령으로 사실상 박정희 한 사람만 선출되게 짜여 있었고, '통대'가 거수기 노릇을 충실히 한 결과였다. 전체적으로 북한을 연상시키는 풍경이었다.
그 후에 치러진 체육관 선거도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박 후보는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혼자 입후보해 99.9% 득표율로 당선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체육관 선거는 계속됐다. 유신 헌법이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단독 출마해 '통대'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치적으로 무력했던 최 권한대행의 득표율은 96.7%에 머물렀다. 1980년 8월 27일에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두환이 단독 출마해 99.9% 득표율로 당선됐다.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좁은 의미의 체육관 선거는 이렇게 네 번 치러졌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었다. '말만 선거일 뿐 사실상 옹립'인 체육관 선거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방식은 바꾼 새로운 제도가 등장했다. 많은 시민에게 넓은 의미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것과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여겨진 제도였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5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가 그것이다. 유신 헌법 방식과 닮았지만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우선 '통대'가 사라지고 선거인단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장충체육관에 모아놓고 대통령을 선출했던 과거와 달리, 선거인단이 각지 선거구에서 투표하게 한 것도 차이점이었다. '통대' 시절에는 후보가 한 명뿐이었지만 이제는 여러 명이 후보로 나서는 모양새를 취했다는 점도 달랐다.
1981년 2월 25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방식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전두환 후보가 90.2%라는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됐다. 민주한국당(민한당) 유치송 후보가 7.7%, 한국국민당(국민당) 김종철 후보가 1.6%를 득표하며 그 뒤를 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전두환 정권 쪽에서 만들어낸 관제 야당이었다. 독재 정권이 들러리 야당까지 뚝딱뚝딱 만든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여당인 민정당이 앞에 서고 관제 야당들이 그 뒤를 따르게 하는 구조였다. 세간에서 1대대(민정당)-2중대(민한당)-3소대(국민당)라는 비웃음을 산, 한국 정당사에 길이 남을 코미디였다. 득표율이 '1대대', '2중대', '3소대' 순이었던 데서도 드러나듯이 제12대 대선 결과에도 이 구조가 그대로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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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1978년 7월 6일 자 1면. 체육관 대통령 선출을 다룬 톱기사 옆에 유신 독재의 또 다른 민낯인 투기 광풍과 부정부패를 단적으로 보여준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기사가 사이드 톱으로 게재돼 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
정몽규 전 회장의 4연임을 가능케 한 축구협회장 선출 방식은 좁은 의미의 체육관 선거와도 맥이 닿아 있지만, 그것을 변형한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방식과 더 닮았다.
먼저 득표율 면에서, 4연임에 성공할 때 정 전 회장이 얻은 몰표 비중(85.2%)은 좁은 의미의 체육관 선거 당시 박정희·전두환 후보의 99.9% 몰표에 비하면 약과였다. 실권 없는 최규하 후보 득표율(96.7%)에도 한참 못 미쳤다.
좁은 의미의 체육관 선거와 달리 정 전 회장의 4연임 선거에는 여러 후보가 출마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정 전 회장과 나머지 후보들의 압도적인 득표 격차도 1981년 제12대 대선 당시 '1대대' 전두환 후보와 '2중대'·'3소대' 후보들의 격차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축구협회장 선출 방식이 구성원 다수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라는 지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선거인단의 30% 정도가 기존 축구협회장 그늘에 있는 단체 사람들로 이뤄지는 등 애초부터 공정 경쟁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기득권 세력의 부정 선거 의혹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정 전 회장의 4연임 선거 당시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선거인단 소속 인사와 접촉해 "정몽규 회장을 밀어줘"라고 요구하며 대가를 약속하는 취지의 정황이 담긴 녹취 파일이 이달 초 KBS를 통해 공개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7년에도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방식을 고수해 다음 대통령을 또 사실상 옹립하려 했다. 그것을 막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것은 직선제를 요구한 시민들의 6월항쟁이었다. 축구협회장 선거와 관련해서도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축구 버전 6월항쟁' 같은 혁신 운동을 통해 새로운 한국 축구 백년대계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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