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을 넘으니 하루 하루가 뜨겁다"

윤흥식 / 2018-07-27 15:41:02
진보시인 오봉옥, 8년만에 다섯번째 시집 출간
세월과 더불어 원숙해진 시인의 눈 보여줘

문단의 대표적 진보작가로 통하는 오봉옥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섯!>(천년의시작)을 펴냈다. 지난 2010년 <노랑> 이후 8년만이다. 

 

▲오봉옥 시인의 신작시집 <섯!> [사진=남궁은]

 

오 시인은 1980년대 후반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 <지리산 갈대꽃>(창비), <붉은산 검은피>(실천문학) 같은 민족사의 비극을 노래한 시집들을 펴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필화(筆禍)를 겪기도 했다.

순수 문학작품을 두고 이적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후일 법무장관 자리에 까지 오른 모 공안검사가 “산이 어떻게 푸르지 않고 붉을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넘어, 참담함마저 느껴진다.

그 ‘야만의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청년 오봉옥은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시를 썼다. 시어에는 시퍼런 날이 섰고, 행간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 오봉옥 시인 [사진=남궁은]

"늙은 애비 헛간에서 죽었더란다

두 섬 쌀마지기 숨겼다고 쪽발이놈이 죽였더란다
고운 아내 골방에서 죽었더란다.
벌건 대낮에 강간하고 양키놈이 죽였더란다
어이어이 못 산 애비 떠메고 들어갔나
어이어이 못 산 아내 묻으러 들어갔나
꽃아 지리산 꽃아"
('지리산 갈대꽃-아버지 10 '부분)

그로부터 30여년. 이순을 바라다보는 시인의 귀밑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렸다. 시어는 부드러워졌고, 세상과 사물을 보는 눈은 깊어졌다. 시인은 신작시집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다.

"단풍 들 나이에 와서야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은 시를 만난 일이었음을
그리하여 새삼 다짐한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시집 <섯!>에는 시대의 불의에 격정으로 맞섰던 시인이 이순을 앞두고 도달한 내면의 평화를 보여주는 시 66편이 실려 있다. 각 시편들이 드러내는 고른 완성도는 시인의 내공이 30년 시력(詩歷)과 더불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보여준다. 

 

▲ 오봉옥 시인 [사진=남궁은]

 

"쉰을 넘으니

하루하루가 뜨겁다
내 가슴은 사랑
용광로처럼 끓고 있다
(...)

저물어간다는 건
슬픈 일만도 아니다
축복이다
몸이 사위어가니
마음의 눈도 생긴 것
(...)

중늙이가 되어
눈물이 많아졌다
이제 썩은 사과 하나에도
눈이 간다"
('다시 사랑을' 부분 ,책 22~23P)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시인에게는 모든 시편들이 자식 같을 터. 그럼에도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꼽으라면 시집 앞부분에 실은 ‘시(詩)’를 꼽겠노라고 오 시인은 말한다.

"어느 날
피투성이로 누워
가쁜 숨
몰아쉬고 있을 때

이름도 모를
한 천사가
제 몸을
헐어주겠다고 사뿐.

사뿐.

사뿐, 그 벌건 입속으로
걸어 들어온 뒤
다시 하늘로
총총
사라져간 것이었다."
(‘시’ 부분. 책 12P)

시인이 세 번의 심장수술과 한번의 척추수술 등 모두 네 번의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썼다는 이 작품에 대해 임우기 문학평론가는 “득의(得意)의 시편으로 꼽을 만하다”고 평했다.

 

이 시의 심연에서, 시적 화자와 천사와의 만남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환각의 형식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환각은 일종의 혼의 부름이라는 것. 

 

“이 시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행을 바꿔가며 강조되어 있는 ‘사뿐,/사뿐,/사뿐’은 애써 힘들여 무엇을 도모하지 않고 하늘의 뜻에 가볍게 자기를 일치시키는 시인의 순결한 마음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임 평론가는 적었다.

오봉옥 시인의 신작시집 <섯!>은 잘 다듬어진 서정시집이기도 하지만 분단현실의 극복의지를 담은 참여시집이기도 하다. 표제작 <섯!>은 이런 시인의 철학과 지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검문하러 올라온 총 든 군인도
검게 탄 초병들의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었다
기찻길 건널목에 붉은 글씨로 써놓은 말 섯!
그 말이 급한 우리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
멈춤 정도야 뭐 말랑말랑한 말로 느껴질 뿐이었다
섯에 비하면 정지나 스톱 같은 말도 그저
앙탈이나 부리는 언어로 느껴질 뿐이었다
남에서 올라온 내 발 앞에 꽝,
대못을 박고 가로막는 섯!
(‘섯’ 부분, 책 41P)

오 시인은 시집 출간 직후 가진 조촐한 출판기념회에서 "돌이켜보면 <지리산 갈대꽃>에서 <섯!>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내가 직접 겪거나, 내 주변 사람들이 경험한 일들을 시로 써왔다"며 "분단현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주제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오봉옥 시인은 19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에 '내 울타리 안에서' 등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 <지리산 갈대꽃> <붉은산 검은피>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노랑>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나를 던지는 동안> <달팽이가 사는 법> 등이 있다. 겨레말큰사전 남측 편찬위원을 거쳐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계간 <문학의 오늘> 편집인을 맡고 있다.

 

KPI뉴스 / 윤흥식 기자 jardin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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