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 사태 등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국제 금융시장이 더욱 불안해졌다. 국제금융의 중심 미국에서 집안싸움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금년 5월로 예정된 임기 만료 전에라도 미 연준 의장을 교체하려고 하고, 거기에 파월 의장이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국제 금값과 은값이 뛰고, 국채 금리도 덩달아 오를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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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1월 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한 제롬 파월 당시 연준 이사와 악수하는 모습. [AP 뉴시스] |
세상은 대체로 파월 의장 편이다. 지난 11일 파월 의장이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자신이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한 다음 날(12일) 미국 안에서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등 전직 연준 의장은 물론 헨리 폴슨, 디모시 가이트너, 로버트 루빈, 제이콥 루 등 전직 재무장관까지 나서서 파월을 두둔했다. 이어서 글렌 허버드, 케네스 로고프, 자레드 번슈타인 등 저명 학자들도 중앙은행 독립성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3일에는 해외 중앙은행 총재들까지 거들었다. 16명의 중앙은행 총재 중에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있었다. 그런데 독일, 프랑스, 일본이 빠졌다. 대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등이 참여했다. 신흥시장국 중에서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뉴질랜드가 참가했다. 그것 때문에 뉴질랜드에서 작은 해프닝이 생겼다. 애나 브래만 뉴질랜드 중앙은행 총재가 그 공동성명에 참가한 사실이 보도되자 외무장관이 발끈했다. "뉴질랜드 중앙은행이 미국의 국내 정치에 뛰어들어서 할 역할은 없다"면서 "선을 지키라(stay in the lane)"고 따끔하게 훈계했다. 아울러 "뉴질랜드 중앙은행 총재는 뉴질랜드 정부를 도와야 하는데, 그런 것은 하지 않았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자 브래만 총재가 움찔했다. "1월 13일에 맞춰 공동성명을 발표하느라 정부에 미처 알릴 시간이 없었다"면서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따지고 보면, 중앙은행 관련 국제기구 중에서 ECB(유럽중앙은행)와 BIS(국제결제은행)의 수장들은 공동성명에 참여했지만, 정작 미국에 소재한 IMF(국제통화기금)의 총재는 빠졌다. 파월 의장과의 개인적 인연이었을까? 그렇다면, 중앙은행 총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현직 대통령과 중앙은행 총재가 갈등을 빚는 것은 신흥시장국에서 낯익은 광경이다. 갈등의 원인은 다양하다. 1989년 터키와 2001년 태국은 금리인하에 비협조적인 것이 이유였다. 2010년 아르헨티나와 2018년 인도에서는 정부의 재정자금 조달에 중앙은행이 비협조적인 것이 이유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외환보유액을, 인도 총리는 이익잉여금을 넘기라고 요구했었다. 2014년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방만한 경영을 이유로 중앙은행 총재를 해임해서 소송까지 갔다. 연준 건물 공사비를 문제 삼는 트럼프 행정부의 지금 모습은 딱 나이지리아 수준이다.
국제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힘 있는 쪽이 부당한 요구를 할 때 힘없는 쪽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주전(主戰)과 주화(主和). 제7대 미국 연준 의장을 지낸 마리너 에클스의 경우 주전을 택했다. 바야흐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이었다. 그때 미국은 재정적자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연 12%에 이르렀다. 백악관이 닦달했지만, 연준은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밀리고 있던 1950년 8월 하순이었다.
그러자 트루먼 대통령이 격노했다. 이제 막 시작된 냉전에서 미국이 공산주의와 힘들게 싸우는데, 연준이 후방에서 그 전쟁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였다. 연준 위원 전원을 백악관으로 불러 훈계하면서 당장 금리를 낮출 것을 지시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에클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메모한 대통령과 재무장관의 발언을 언론에 흘렸다.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마침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뛰어들어서 재정적자 확대는 불 보듯 뻔했으므로 여론은 연준을 두둔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당황해서 한발 물러섰다. 연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재무부-연준 화해각서'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더 이상 금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문서로 보장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재무부-연준 화해각서'의 산파 역할을 한 에클스를 독립투사로 기억한다. 지금 공사 중에 있는 미 연준 건물의 이름이 바로 에클스 빌딩이다. 미국 의회가 정해준 공식 이름이다. 그 건물에서 근무하는 파월은 연준 의장 임기가 끝난 뒤에도 연준에 머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법률적으로 그는 2028년 1월까지 평위원으로 머물 수 있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두 번이나 있었다.
주화(主和) 쪽에 섰던 사람도 있다. 제10대 의장인 아서 번즈가 그랬다. 그는 1960년 대선 당시 닉슨 후보(당시 현직 부통령) 캠프에서 일했는데, 선거에서 이기려면 연준을 압박해서 금리를 서둘러 낮춰야 한다고 닉슨에게 조언했다. 하지만 닉슨은 이 조언을 흘려서 들었다. 나중에 케네디에게 패배한 뒤 번즈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회고록 '여섯 개의 위기(Six Crises)').
그런 경험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대통령이 된 닉슨은 번즈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970년 2월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나는 당신이 금리에 관해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존중합니다. 당신도 낮은 금리와 충분한 통화공급이 필요하다는 나의 견해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동의해 주길 바랍니다."
그 말 때문이었는지 번즈는 금리 인상 시기를 최대한 늦췄다. 하지만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연 5.8%까지 이르자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71년 7월이었다. 재선을 노리던 닉슨이 불같이 화를 냈다. "미국 역사상 실업 때문에 선거에서 진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인플레이션 때문에 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면서 "내가 그자의 턱을 날려 버리겠어(He'll get it right in the chops)"라고 별렀다.
이어서 '천재적 악마(Evil Genius)'라는 별명을 가진 찰스 콜슨(Charles Colson) 정무 보좌관을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그는, '번즈가 자신의 연봉 2만 달러 인상안을 대통령에게 은밀히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려 번즈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이어서 닉슨 대통령은 조지 슐츠(훗날 재무장관) 예산국장을 불렀다. 번즈와 접촉해서 자기 말을 똑바로 전하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닉슨은 "번즈는 말이야 연준이 자율적이라는 신화(myth of the autonomous Fed)를 순진하게 믿나 봐"라며 연준 위원 정원을 7인에서 14인으로 늘리는 복안을 흘렸다. 번즈를 고립시키겠다는 압박이었다. 결국 번즈는 닉슨에게 달려와 눈물로써 고통을 호소하고, 11월과 12월 연속해서 금리를 낮췄다. 그 결과가 1970년대 계속된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임명권자의 부당한 요구 앞에 주화론(主和論)으로 대처한 결과 온 국민이 오랫동안 힘들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렵다. 권력자를 상대로 아랫사람이 원칙을 지켜야 할 때는 각별한 고민과 희생이 따른다. 16세기 영국의 대법관 토마스 모어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이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헨리 8세의 주장에 적극 찬동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당했다. 17세기 영국의 법무장관 에드워드 코크는 증거도 없이 기소하라는 제임스 1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지금 파월 연준 의장이 비슷한 시련을 겪고 있다.
1998년 유럽중앙은행(ECB)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 세계적으로 닷컴 버블이 붕괴했다. 회원국 국가원수들이 ECB를 향해 금리 인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때 빔 다위센베르흐(Wim Duisenberg, 네덜란드) 총재는 "저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만,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I hear, but I do not listen)"라고 응수했다. 그것을 두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앙은행이 국민 위에 군림하느냐는 불만이었다.
중앙은행은 선거를 통해 책임지지 않으므로 중앙은행을 '선출되지 않은 권력(unelected powe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책임과 권한이 불균형을 이루므로 중앙은행을 향해 '민주주의의 적자(democratic deficit)'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그래서 중앙은행 총재는 고독하다. 동료 중앙은행 총재의 어려움에 동정을 표시하려고 공동성명에 서명한 것을 두고도 비판받는다. 중앙은행 총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트럼프가 전 세계의 중앙은행을 향해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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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현진 객원논설위원 |
● 차현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은행과 금융제도 전문가다. 38년에 걸친 한국은행 근무 기간 중 통화정책과 경제조사, 금융제도 등을 깊이 연구했으며, 2년의 예금보험공사 이사 경험을 통해 금융안정과 예금자보호를 다루었다.
△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Wharton School) MBA △ 1985년 한국은행 입행 △ 2003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 2005년 미주개발은행(IDB) 컨설턴트 △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커뮤니케이션국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 역임 △ 2023년 예금보험공사 상임이사 △ 2025년 가을 호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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