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취임 선서다. 헌법(제69조)에 그 문구가 명시되어 있으므로 대통령이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 그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손을 올리고 독백한다. 반면 미국 대통령은 대법원장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한다. 하지만 그것은 법적 요건이 아니라 관행이다. 대통령 유고사태가 벌어지면, 그런 관행은 파기된다. 쿨리지(1923년)는 하딩 대통령이 급사하자 한밤중에 아버지 앞에서 선서하고 취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년)는 매킨리 대통령이 총을 맞아 사망한 직후 성경책 없이 선서했다.
그러면, 대통령 이외의 공직자는 어떨까?
한국의 장관이나 기관장들은 임명장을 받을 때 별다른 선서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모든 공무원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취임 전에 반드시 선서한다. 그것은 공직자의 의무다. 선서의 내용까지 법에 담겨 있다(공직자법 제3331조). 하지만 누구에게 선서하느냐는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는 심지어 직장 부하에게 손을 들고 선서하는 경우도 있다. 2006년 2월 벤 버냉키 연준 의장(제14대) 취임식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도 참석했다. 하지만 그날 버냉키 의장은 부시 대통령이 아닌, 로저 퍼거슨 부의장에게 선서했다. 1970년 아서 번즈(제10대), 1987년 앨런 그린스펀(제13대) 의장도 대통령을 옆에 두고 각각 법무장관과 부통령에게 선서했다. 2014년 자넷 옐런 의장(제15대)은 심지어 자기보다 하위직급 즉, 대니얼 타룰로 연준 평위원에게 선서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사람에게 충성하지만, 미국은 법에 충성한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미국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16일 스티븐 마이런 신임 연준 위원이 취임했다. 그도 집무에 앞서 누군가에게 선서해야 했다. 그래서 출근길에 법원에서 들러 지방판사에게 선서를 하고 출근했다. 연준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그의 선서를 받아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근 첫날부터 '왕따'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일은 지난 100년 동안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연준 소식을 전달하는 국내 언론이 까맣게 모르고 놓친 낙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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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준이 (아마도 당사자에게 얻어서) 공개한 스티븐 마이런 위원(왼쪽 첫번째)의 취임 선언 장면. |
보통 연준 위원이 취임하면, 의장 또는 부의장이 자기 집무실에서 선서를 받아준다. 그런데 스티븐 위원이 취임할 때는 제롬 파월 의장을 포함한 어떤 위원도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연준은 지금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직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대통령 경제고문이라는 본업을 잠시 휴직하고, 단지 4개월만 근무하려고 출근하는 마이런을 반갑게 맞이할 이유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그는 전폭적인 금리인하를 서슴지 않고 요구해 왔던 인물이다. 연준에서 보기에 마이런은 4개월 동안 백악관에서 파견 나온 트럼프의 '꼬붕'(부하)이다. 연준 위원과 직원들이 배알이 있는 이상 그런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마이런 신임 위원은 취임 당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1%포인트 이상의 금리인하에 표를 던졌다.
연준은 2012년 1월부터 점도표(dot plot)를 발표하고 있다. 점도표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 참석하는 19인의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장래의 적정금리 수준에 관한 분포도다. 대중에게 미래의 정책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려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일환이다. 그런데 점도표가 유용한 정보가 되려면, 19인의 참석자들이 어느 정도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 국회처럼 극단적인 대립 상황에서는 어떤 사안에 관한 국회의원들의 생각의 분포와 그 분포의 변화가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 마이런 신임 위원이 뛰어든 연준의 점도표가 그러하다. 이는 연준이 강조해 온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의 유용성 자체를 약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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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준이 공개한 점도표(회의 참석자들이 생각하는 향후 적정금리 수준의 분포도). 붉은 원이 신임 마이런 위원의 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런 분위기라면, 내년 1월 마이런이 백악관으로 복귀할 때까지, 아니 5월 제롬 파월 현 의장이 퇴임할 때까지 연준은 내우외환에 시달릴 것이 확실하다. 밖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안에서는 마이런 위원이 연준을 뒤흔들 것이다. 당장 대통령의 해임에 불복해서 소송을 진행 중인 리사 쿡과 스티븐 마이런이 연준 안에서 어색한 동거를 하면서 사사건건 충돌할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한미 통상문제의 원만한 해결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 정부는 이재명 대통령을 필두로 구윤철 부총리, 김정관 장관, 김용범 정책실장, 그리고 이창용 한은 총재까지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 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연준이 캐나다, 영국, 유로, 일본, 스위스 5개국하고만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을 맺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미국에 3500만 달러를 투자할 테니 한국을 여섯 번째 나라로 추가해 달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다. 지금 미국이 돌아가는 꼴을 볼 때, 한국의 요구와 기대는 실현되기 어렵다.
미 연준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에 따라 당시 각국 중앙은행들과 체결했던 통화스와프계약 내역을 낱낱이 의회에 보고했다. 통화스와프 계약은 위기에 처한 외국을 돕는 중요한 수단인데, 그렇다면 의회가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을 반영한 입법 조치였다. 의회는 어느 때라도 제롬 의장을 불러 통화스와프계약을 채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 연준은 한국은행과 통화스와프 계약을 맺을 때 의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리인하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가 쉽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통상문제 해결을 위해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을 맺으시오"라고 한들 제롬 파월 의장이 이를 덥석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외국과의 통상문제는 연준의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니다. 만일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한다면, 의회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대답이 아주 궁색해진다.
결국 한국은 백악관이나 연준을 아무리 졸라봐도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을 성사시키기 어렵다. 그것은, 실무를 맡은 한국은행이나 정부 부처의 무능력 때문이 아니다. 미국의 법적 배경과 정치 상황 때문이다. 그러니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를 압박해서 3500억 달러에 이르는 대미 투자 약정액을 낮추는 쪽으로 목표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추석 연휴에도 출근해서 미국과 열심히 접촉해야 하는 공직자들이 생각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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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현진 객원논설위원 |
● 차현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앙은행과 금융제도 전문가다. 38년에 걸친 한국은행 근무 기간 중 통화정책과 경제조사, 금융제도 등을 깊이 연구했으며, 2년의 예금보험공사 이사 경험을 통해 금융안정과 예금자보호를 다루었다.
△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Wharton School) MBA △ 1985년 한국은행 입행 △ 2003년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 2005년 미주개발은행(IDB) 컨설턴트 △ 한국은행 워싱턴사무소장, 기획협력국장, 커뮤니케이션국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 역임 △ 2023년 예금보험공사 상임이사 △ 2025년 가을 호서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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