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의열단장 김원봉의 동지이자 아내
김명시, '장군'으로 불린 여걸…의문의 죽음
이화림, 한인애국단·조선의용대 등에서 활약
성차별도 이겨내야 했던 여성 독립군 현실
광복 넉 달 후인 1945년 12월, 밀양 출신 독립투사 김원봉이 한 여성의 유골을 품고 귀국했다. 그는 유골을 고향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유골의 주인공은 김원봉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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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차정과 김원봉의 결혼 기념 사진.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갈무리] |
박차정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최대 여성 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있던 1930년 구속됐다. 10여 개 여학교에서 연합해 전개한 서울 여학생 만세 운동의 배후 중 한 명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해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했다. 그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서 독립운동 기간요원을 양성하고 항일 연합 전선을 지향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활동했다.
1938년 창설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의용대에선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았다. 1939년 일본군과 맞선 장시성 쿤룬산 전투에서 크게 다쳤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박차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공적에 비해 뒤늦은 서훈이었다. 광복 후 돌아온 조국에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는 등 수모를 겪고 월북한 김원봉의 행적 때문에 박차정까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얼마 전 서경덕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박차정을 알리는 영상을 제작해 공개했다. 반가운 일이다. 잊지 말아야 할 독립군 여전사는 박차정 외에도 여럿 있다. 그들 중 박차정과 연배가 비슷한 김명시와 이화림의 삶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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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여장군"이라며 김명시 이야기를 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자 1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
김명시는 1907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현실에 눈떴고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과 혁명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체포돼 1939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김명시의 오빠와 남동생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3명의 수감 기간은 도합 25년이다.
출소 후 김명시는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다.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이 조직에서 김명시는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장군'으로 불렸다. 독립군 여전사가 동지들에게 '장군'으로 불린 건 드문 일이다.
광복 후 귀국한 김명시는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으로 치닫고 남쪽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김명시가 설 자리는 사라져 갔다.
1949년 김명시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해 10월 정부에서 '체포된 김명시가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후 오랫동안 김명시는 잊혔다. 남쪽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는 수십 년간 금기시됐고 북쪽에서는 조선독립동맹 계열 인사 다수가 김일성 세력에게 숙청됐기 때문이다. 2022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는 김명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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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은 노년의 이화림, 오른쪽은 이화림이 다친 대원을 응급 처치하는 모습.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갈무리] |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화림은 1930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1931년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담해 활동했다.
생전에 이화림은 자신이 상하이에서 사격과 무술을 배우고 김구를 도와 밀정 처단 활동 등을 했다고 밝혔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거, 4월 윤봉길 의거에 관여했다는 말도 했다. 이봉창에게 폭탄을 숨길 속옷을 만들어주고 윤봉길 의거를 거사 직전까지 함께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이화림 이야기가 안 나온다. 이화림이 김구의 투쟁 방식에 의문을 품고 김구를 떠나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있다.
이화림은 1930년대 후반부터 박차정이 이끈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일원으로 항일 선전 활동 등을 전개했다. 1943년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진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야전 병원 간호사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중국에서 의사 등으로 일하다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박차정·김명시와 달리 이화림은 서훈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한국전쟁 때 중국·북한군 진영에서 의료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훈 여부와 별개로 이화림이 대륙을 누비며 20세기를 뜨겁게 살아간 독립군 여전사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화림 관련 기록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성차별 문제다. 조선의용군 분대장으로 활약한 작가 김학철은 남성 대원 상당수가 이화림을 성차별적으로 대했음을 고백하는 글을 남겼다.
독립군 내 성차별을 이화림만 겪은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썼다. "여성 독립군은 누구도 성차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군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들의 긍지는 드높았다."
3·1절과 세계 여성의 날(8일)이 있는 3월에 되새길 만한 이야기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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