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잡은 사우디 "아랍인인 것이 자랑스러운 날"

김당 / 2022-11-23 19:52:48
임시공휴일 선포…"믿을 수 없는 날, 모든 아랍인이 행복"
빈 살만 왕세자 지도력과 아랍인들 공동 응원전이 큰 힘
"사우디 승리로 아랍권 통합"…카타르에도 정치적 기회
지난 22일(현지시간)은 중동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월드컵에 참가하는 아랍 팀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날이었다. 이날 카타르 월드컵 최약체 중 한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리오넬 메시가 이끄는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2-1로 꺾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 '사우디 가제트'는 "'녹색 매떼'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불가능을 해내고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 선수단의 탈의실에서는 행복한 장면이 연출되었다"며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사우디 가제트 캡처]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51위인 그린 팰콘스(Green Falcons, 사우디 대표팀)가 202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포함해 A매치 36경기 무패 행진을 벌여온 아르헨티나(3위)를 잡은 것이다. 1990년 카메룬 이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은 비유럽팀은 사우디가 처음이다.

아랍 형제들에게 행운은 혼자 오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는 튀니지(30위)가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10위)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중동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아랍 각국의 응원단은 자국팀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경험인데, 자국팀이 남미와 유럽의 강호를 무릎 꿇리거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니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앞서 경기를 치른 개최국 카타르가 에콰도르에 0-2로 패해 개최국 무패 기록이 깨진 데다가, 이란마저 잉글랜드에 2-6으로 대패를 당해 사우디 승리의 기쁨은 배가되었다. 사우디 축구팬들은 새벽까지 국기를 몸에 두른 채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우디의 '녹색 매떼'를 조련한 에르베 르나르 감독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이게 축구다. 때로는 상황이 완전히 미쳤다"며 "모든 스타들이 우리를 위해 정렬했다"라고 외쳤다.

본선 진출이 확정된 것이 아닌 단 한번의 토너먼트 승리임에도, 살만 사우디 국왕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듯 이 역사적인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공공 및 민간 부문 근로자와 학생들을 위해 23일을 임시 공휴일로 발표했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22일(현지시간) 카타르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를 가족과 텔레비전으로 관람하는 가운데, 형인 압둘아지즈 에너지부 장관(왼쪽사진 왼쪽)과 동생(오른쪽사진 오른쪽)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인스타그램 캡처]

보수적인 사우디 왕가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친형과 동생 등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관람하면서 가족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하는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빈 살만과 그 형제들이 공개한 가족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일부는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가운데, 일부는 몸을 돌려 알라신을 향해 엎드려 기도를 하기도 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 국기를 들고 있는 친형 압둘아지즈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과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사우디의 소셜 미디어에서는 종교 지도자들과 많은 공인들이 재빠르게 승리를 빈 살만 왕세자의 지도력에 돌리기도 했다.

▲사우디의 유력지 오카즈(Okaz)는 사우디의 승리 소식과 빈 살만 왕세자의 응원 등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오카즈 누리집 캡처]

하지만 진짜 인기인은 팀원들, 특히 대표팀 골키퍼였다. 사우디인들은 "우리 매는 우리의 자존심 (Our Falcons are our pride)", "우리의 녹색 우선(Our green ahead of all)"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사진을 올렸다.

사우디가 파란을 일으키자 국내 온라인에서는 "사우디가 16강에 진출하면 빈 살만 왕세자가 국가대표팀에 포상금 5400억원을 준다"는 글이 유포된 가운데, "사우디의 기적은 포상금 때문"이라는 글이 확산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 특별한 관심을 둔 것은 사실이다. 돌연 일본 방문을 취소한 빈 살만 왕세자는 20일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카타르 도하를 찾았다. 그동안 사우디는 카타르가 이슬람 단체의 테러를 지원했다며 관계를 단절했었다.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은 인권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타격을 입은 카타르에게도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였다. 카타르 국왕은 사우디와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사우디 국기를 흔들고 응원했다. 카타르 국왕은 사우디가 승리하자 트위터에 잠시 사우디 국기를 내걸기도 했다.

중동에서 처음 열린 월드컵에서의 '충격적 승리'는 비단 사우디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사우디의 영자지 '사우디 가제트'는 아랍 지역 국가 지도자들의 축하와 환호를 전하면서 "사우디의 승리 축하 행사에서 도취적인 장면이 분출한 가운데 아랍과 중동 지역이 통합되고 있다"고 정치사회적 의미를 부여했다. [사우디 가제트 누리집 캡처]

영자지 '사우디 가제트'는 아랍 지역 국가 지도자들의 축하와 환호를 전하면서 "사우디의 승리 축하 행사에서 도취적인 장면이 분출한 가운데 아랍과 중동 지역이 통합되고 있다"고 정치사회적 의미를 부여했다.

사우디 가제트는 "아랍 지도자들과 대중은 월드컵 90년 역사상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를 '그린 팰콘스'가 봉인한 즐거운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중동 지역 전역의 축구 팬들과 함께 했다"면서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UAE), 그리고 파키스탄의 통치자의 환호와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중동권의 대표 위성방송으로 아랍의 시각에서 중동 소식을 전해온 '알자지라'는 이날 '아랍인인 것이 자랑스러운 날(Proud day to be Arab)'이라는 제목의 도하발(發) 기사에서 사우디와 튀니지 응원단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알자지라'는 카타르 월드컵 개막전에서 사우디가 아르헨티나를 2-1로 승리하자 22일(현지시간) '아랍인인 것이 자랑스러운 날(Proud day to be Arab)'이라는 제목의 도하발(發) 기사와 공휴일 지정 소식 등을 전했다. [알자지라 누리집 캡처]

"믿을 수 없는 날이다. 모든 아랍인들이 행복하다. 아랍인이 된 것이 자랑스러운 날이다. 먼저 사우디아라비아는 우리가 세계 최고와 상대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 튀니지는 우리가 세계 최고 팀들 중 하나와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우리는 지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날 일찍 가게 문을 닫거나 아예 문을 열지 않고 카페의 텔레비전 앞에 모인 튀니지인들은 킥오프 한 시간 전에 사우디의 충격적인 승리를 목격하자, '카르타고의 독수리'(튀니지 대표팀)도 덴마크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고조됐다.

경기는 전-후반 모두 무득점으로 끝났지만, 튀니지 응원단은 승리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다. 튀니지 서포터즈에게 이날 경기는 이른바 '졌잘싸'가 아니라 '비승경'(비겼지만 승리한 경기)으로 느껴졌다.

알자지라는 생활비 폭등, 생필품 부족, 실업률 급증 등으로 경제가 침체돼 환호할 것이 별로 없던 튀니지 사람들의 초점은 이제 29일로 예정된 '디펜딩 챔피언'이자 '오랜 압제자'인 프랑스와의 대결에 쏠려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동에서 처음 치러진 월드컵에서 '아랍의 환호'가 계속 이어질지는 '카르타고의 독수리'들이 월드컵 본선의 대표적인 저주 가운데 하나인 '챔피언 징크스'를 수호할지에 달린 셈이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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