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의 경제분석] 부자유친(父子有親)? 부자불신(父子不信)의 시대

UPI뉴스 / 2022-06-12 12:36:34
눈 감는 날까지 아들도 딸도 믿을 수 없는 부자들의 말년
롯데 고 신격호 회장, 두 아들 다툼에 초라한 말년 공개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 정신 입증하러 법원 출석 수모
아워홈 고 구자학 회장, 자녀 다툼속 험한 꼴 겪다 별세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이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가정윤리의 실천덕목 오륜(五倫)의 하나다.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라는 말이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체감하기 힘든 세태다.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거꾸로 부자불신(父子不信)의 시대다.
 
재산 물려주되 효도 않으면 다시 빼앗는 금융상품

지난 2017년 국내 한 증권사가 증여안심신탁이라는 상품을 출시했다. 자산가가 재산을 자녀에게 증여한 뒤, 효도를 외면하거나 가업 승계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재산을 다시 뺏을 수 있도록 한 서비스 상품이었다. 재산을 자녀에게 조건을 붙여 증여하고 그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증여를 해제할 수 있도록 금융회사가 신탁 계약을 통해 재산을 수탁하는 구조로 돼 있었다.

상품 출시 초기만 해도 과연 이런 상품이 필요할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다만 주식 가치가 떨어졌을 때 이 상품을 활용하면 증여세를 줄이면서 부모가 의결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절세에 초점이 맞춰진 상품으로 해석됐다.

그런데 이 상품의 수탁액이 올해 들어 작년에 비해 무려 6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작년에 비해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는 점에서 절세 차원의 수요가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업계의 분석은 절세보다는 자녀를 믿지 못하는 세태를 반영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재산을 넘겨주면서도 자녀를 통제권 안에 두려는 의도가 많다고 한다. 재산을 자녀에게 넘겨주고 싶지만, 과연 재산을 넘겨준 이후에도 자식 된 도리를 다 할 것인지에 대해 믿음이 없어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 상속

재벌 집안의 재산 상속에는 항상 잡음이나 다툼이 있었다. 삼성가 이맹희, 이건희 형제가 그랬고 현대가 정몽구, 정몽헌 형제도 비슷한 내홍을 드러냈다. 한화 김승연 김호연 형제도 재산 다툼이 심했던 집안 중 하나다. 이들 뿐이겠나.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열거한 이런 집안들은 다툼이 담장 밖으로 전해진 것이고 다른 거의 모든 자산가의 상속에는 예외 없이 갈등, 반목이 있었다고 한다. 

왜 이런 다툼이 생기는 것일까?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한마디로 결론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 재벌들, 창업주든 2세 경영인이든, 자기 회사의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기업들은 상호출자라는 고리로 복잡하게 얽혀있고 내부적으로는 큰아들 사람, 둘째 딸 라인, 이런 식으로 파벌이 형성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고르게 재산을 분배하면 그룹이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간의 반목이나 다툼을 예상하면서도 어느 한 자식에게 몰아 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적지 않은 잡음이 담장 밖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재벌들이 비자금을 모으는 이유가 불법적 로비를 위한 것도 있지만 재산 상속에서 주요 기업을 물려주지 못한 자녀를 돈으로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다툼과 갈등의 당사자는 형제들이었다. 다른 형제에게 재산을 몰아준 아버지가 불만스럽긴 해도 직접 아버지에 대해 갈등을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다.

▲ '재벌 회장님'들의 말년이 험하다. 자녀들의 재산 다툼 속에 정신이 멀쩡한지 검증받는 처지에 몰리곤 한다. 왼쪽부터 롯데 故 신격호 회장,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 아워홈 故 구자학 회장. [UPI뉴스]

재벌들의 상속 다툼에 등장한 성년후견 제도 


지난 2016년 롯데그룹 신동빈, 신동주 형제 사이에서 재산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생전 들어보지 못한 법률 용어가 등장했다. 성년후견제도. 과거 한정치산, 금치산으로 불리던 제도가 이름을 바꾸고 제도를 보완해서 2013년부터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때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이다. 정신적으로 제약이 있어서 본인이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법원이 판단해 후견인을 지명하는 그런 제도라고 보면 된다. 

롯데의 경우 신격호 회장이 치매 등으로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법원이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당시 법원은 한정 후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한마디로 재산 싸움을 벌이고 있던 형제 중 어느 한쪽의 요구로 신격호 회장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정말로 문제가 있느냐 여부를 떠나, 신격호 회장의 초라한 말년의 모습이 공개된 것이다.

한국타이어에 이어 아워홈도 "아버지 정신에 문제 있어요"

롯데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한국타이어 조씨 집안에서 다시 아버지를 대상으로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지난 2020년 아버지 조양래 회장이 자신의 지분 23%를 차남인 조현범 회장에게 몰아주자, 장녀가 문제를 제기했다. 법원은 지난 4월 이 청구를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각했다.

그러나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양래 회장은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고, 작년 12월에는 법원에 직접 출석해 자신이 정상임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법원 결정에 대해 장녀측에서는 항소를 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85살인 조양래 회장은 앞으로도 자신의 정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니 편안한 노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성년후견제도는 종합식품기업인 아워홈에서도 불거졌다. 아워홈은 LG그룹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의 아들 구자학 회장이 만든 회사로 LG와 관계가 있는 회사로 잘 알려진 기업이다. 특히 구 회장의 부인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 씨로, 삼성과 LG의 결합으로 자주 회자됐던 인물이다.

구 회장은 1남 3녀를 두고 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해 아들인 구본성 당시 부회장이 보복 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구미현 구명진 구지은 세 자매가 구본성 전 부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하고 막내인 구지은씨가 대표로 등장한 것이다.

당시 형제 자매간의 지분 구성을 보면 구본성 전 부회장이 38.56%로 압도적으로 많고 나머지 세 딸은 각각 19% 내지 20% 정도씩 보유하고 있었다. 세 딸이 똘똘 뭉쳐 아들을 몰아낸 것이다.

구 전 부회장은 이런 딸들의 움직임의 뒤에는 아버지가 있다고 보고 아버지를 대상으로 성년후견 신청을 한 것이다. 구자학 회장은 지난달 91세로 별세했으니 험한 꼴을 더 이상 보지는 않게 됐다. 그러나 말년에 아들로부터 정신에 문제 있다는 주장을 들었으니 말년이 편했을 리가 없다.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하지만 그 바탕에는 마음의 병이 컸으리라 짐작이 간다.

재벌급 집안들은 그나마 집안 갈등이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부동산을 비롯한 온갖 투기로 떼돈을 벌어들인 졸부 집안은 상속 갈등이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그런 것일까. 성년후견을 신청하는 건수가 시행 초기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2014년 380건이던 것이 2018년에는 941건으로 늘었고 2019년 이후에는 매년 천 건이 넘는 성년후견 신청이 청구되고 있다고 한다.

재산을 물려주되 눈을 감는 날까지 아들도 딸도 믿을 수 없다는 슬픈 세태가 증여안심신탁이라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금융상품을 만들어 낸 것 같다.

▲ 김기성 경제평론가

● 김기성

△ 서울대 사회학과 △ SBS 경제부장 △ SBS 뉴욕 특파원 △ SBS 보도제작국장 △ SBSCNBC 대표이사 △ TV조선 뉴스센터장 △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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