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보통사람' 지위마저 세습하는 사회

유충현 기자 / 2024-04-30 18:00:32
상위 20% 가구 자산 2년간 1.3억 증가…하위 가구 몇 년치 소득
20~30대 자산취득에 '부모찬스'…피케티, '세습 자본주의' 경고

10년 쯤 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을 펴냈다. 피케티는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커지면서 소득불평등이 점점 심해진다는 것을 방대한 실증 데이터로 보여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한 보고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신한은행이 얼마 전 펴낸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 2024'라는 제목의 100쪽 짜리 보고서다. 이 책자는 전국 만 20~64세 1만 명을 대상으로 수집한 금융생활 실태 조사 결과를 담고 있다. 

 

사람은 때때로 돌려서 말할 줄 알지만 숫자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는 가끔 가혹하다. 보고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사람'의 월평균 가구소득이 나온다. 지난해 기준 544만 원이다. 월 세후 실수령액이 544만 원이라면 연봉은 8100만 원 정도 된다. 가구소득이 여기에 못 미친다면 '보통 미만'인 셈이다. 

 

가구소득에 따른 소득과 자산도 볼 수 있다. 상위 20%(5구간)는 한달에 1085만 원(연 1억3020만 원)을 번다. 보유 중인 자산은 11억6699만 원이다. 직전 2년 동안 자산 증가액이 1억3189만 원으로 1년치 소득보다 많다. 하위 20%(1구간)는 월 195만 원(연 2340만 원) 을 번다. 

 

상위 20%는 자산가치 상승분만으로 하위 20%의 몇 년치 소득을 얻는 셈이다. 근로소득만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산을 가진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숫자는 말한다.

 

국내 가구가 보유한 자산의 대부분(72~82%)은 부동산이다. 보고서는 사람들이 부동산을 어떻게 취득하는지도 보여준다. 제시된 수치를 보면 '첫 집'을 마련한 20~30대의 절반 가량(48.4%)은 구입 당시 집값의 70% 이상을 '대출 또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충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얼마가 대출이고 부모님의 지원인지 따로 구분해 두지는 않았다. 다만 간접적으로 추정할 순 있다. 조사 대상 가구의 평균 부동산 자산은 4억8035만 원이다. 이 중 최소 30%(1억4400만 원)는 LTV(총부채상환비율) 규제 탓에 은행 대출이 불가능하다. 작년 기준 월평균 저축액 105만 원을 11.4년간 모아야 하는 돈이다. 

 

그만한 돈을, 혹 신용대출까지 포함한다 해도 1억 원 가량을 '부모 찬스'로 마련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마련한 첫 자산이 이후 삶에서 계속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요약하면 근로소득으로는 자산의 증가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고 젊은이들이 평균 수준의 자산을 획득하려면 부모 찬스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는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우려했던 '세습 자본주의'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는 불평등이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경고하면서 각종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경제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물론 한 경제학자의 주장을 맹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보통사람으로서 금융생활을 하기 위해 부모 찬스가 필요한 경제시스템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보고서의 숫자들이 던져준 질문에 가슴이 무겁다. 

 

▲ 유충현 경제산업부 기자

 

KPI뉴스 / 유충현 기자 babybug@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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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충현 /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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