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그리움에서 생에 대한 대긍정으로 환하게 나아간
컴퓨터 속 미발표작과 출간되지 않은 시들 60편 수록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작고 낮고 숨은 것들에 대한 헌사"
이제는 늙고 병들어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처럼 가벼워진 나를 등에 오르라며/ 함께 가자고 사자자리까지 함께 가자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 미련이 가엾어/ 엉거주춤 땅에서 발을 못 떼는 나를 울면서/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오른다 왜가리가 날아오른다/ 훨훨 새떼가 날아오른다 _ '훨훨 새떼가' 부분
![]() |
| ▲ 1주기를 맞아 유고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난 신경림 시인. 마지막까지 긴장도가 떨어지지 않는 한결같은 시편들이어서 후배 시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는 평가다. [창비 제공] |
신경림(1935~2024) 시인이 새떼와 함께 비상한 지 1년 만에 지상에서 써놓은 유고들을 묶은 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창비)가 출간됐다. 이 시집은 11년 전 펴낸 생전 마지막 시집 '사진관집 이층'과는 정조가 크게 다르다. 이전 시집은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며 애틋한 그리움과 아픔을 토로하는 허무한 정조가 바탕이었다면, 이후 80대를 관통해 오며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가 남긴 시편들은 생에 대한 긍정이 압도한다.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모든 것들은, 돌아보니 꽃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유고 시집은 지나온 꽃밭을 돌아보는 짧은 시편으로 문을 연다.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_ '고추잠자리'
신경림은 이전 시집에서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 어쩌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그 시절이 싫다고 되뇌었다. 세상의 소음이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고 했다. 슬픔이 그리움과 함께 도저했던 것인데, 정작 이후 대장암 수술을 거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80대를 관통하면서는 지나온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비우고 넓어지는 대긍정의 시인정신이 펼쳐진다.
1주기(5월22일)를 맞이하면서 시인의 가족이 컴퓨터에 남아 있던 미발표 시와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들을 그러모아 창비 편집부에 보냈고, 도종환 시인이 검토 작업을 벌여 60편을 담은 유고 시집을 출간했다. 생의 '해 질 녘'에 보니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고 "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도 보인다고 노래한다. 어두워 오는 해 질 녘에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고 쓴다. 나아가 그는 "이제 춥고 어두운 골목 같던 내 스물을 나는/ 불행으로만 기억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저녁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 터무니없이 들뜨던 술집이 싫고,/ 통금에 쫓겨 헐레벌떡 돌아오면 늦도록 기다리다/ 문을 따주던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싫다./ 중풍으로 저는 다리가 싫고/ 죽은 아내의 체취가 밴 달빛이 싫다"('나의 마흔, 봄')던 태도와는 크게 다르다. 그는 이제 "이십대의 골목 끝에는 벌들이 잉대는 꽃밭이 있었으니까 그 시절을 불행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고 쓴다.
"한숨과 탄식으로 얼룩졌던 내 서른을/ 나는 슬펐다고 탄식하지는 않는다./ 한숨과 탄식을 달래주는 너의 환한 웃음이 있었으니까./ 그 웃음을 타고 나는 세상을 돌아다녔다./ 너무 많은 것을 얻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금은 부끄러워하면서.// 마흔 쉰 예순 일흔……/ 주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았다./ 빼앗기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더 많았다./ 꽃밭에 와 서니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 내가 살아온 길이 환히 보인다." _ '꽃밭에서' 부분

그가 말하는 꽃이란 개나리 벚꽃 살구꽃 목련 같은 것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생명체를 포괄한다. 개울 아래 모여든 새떼의 춤 솜씨도, 그들의 노래로 흔들리는 물속 고기들도, 집집 쏟아져 나온 개와 고양이들도, 주말 개울장에 왁자지껄 모인 사람들도 '꽃, 꽃, 온통 꽃'이다. 이처럼 환한 긍정은 그가 대장암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새삼 깨달은 생에 대한 자각과 노년의 지혜와 넓어진 시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는 "퇴원해 귀가하는 차 안에서,/ 거실 창밖으로 산언덕을 바라보며,/ 핸드폰 속에서 울리는 손자들의 목소릴 들으며" 행복했다고, "내가 이룬 일도, 내가 얻은 것도/ 돌아보면 빈 허공뿐이고/ 뿌연 안개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안개뿐이고 허공뿐이어도 행복하다고 되뇌며" 둘레길을 걷는다. 생에 대한 긍정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필멸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그 유한한 모든 것들에 대한 아낌없는 찬탄에 이르러 절정이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늘을 훨훨 나는 솔개가 아름답고/ 꾸불텅꾸불텅 땅을 기는 굼벵이가 아름답다/ 날렵하게 초원을 달리는 사슴이 아름답고/ 손수레에 매달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늙은이가 아름답다// 돋는 해를 향해 활짝 옷을 벗는 나팔꽃이 아름답고/ 햇빛이 싫어 굴속에 숨죽이는 박쥐가 아름답다// 붉은 노을 동무해 지는 해가 아름답다/ 아직 살아 있어, 오직 살아 있어 아름답다/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_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시인이 살아 있는 것들을 찬미하는 자세는 생에 대한 집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헛헛하게 그 생으로부터 날아오르는 사유가 뒷받침될 때 진정한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다. 훨훨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다가 시인 자신이 그 새가 되어 망각의 해방구에서 자연의 일부로 스며드는 장엄을 묘사하는 '새떼'는 사후 행로를 선언처럼 남긴 절창이다.
오랜 세월 내 몸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던 것들이/ 둥지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쏜살같이 하늘로 달려 올라간다./ 새떼다.// 나도 그것들을 쫓아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끼룩끼룩 꾸르르/ 새떼를 쫓아 하늘로 날아오른다./ …/ 한때 제 거처였던 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제는 한 점 이슬로 굴참나무 잎에 매달린 나를 멀리 바라보면서.// 다 잊어서/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어/ 찬란한 아침 햇살에 날개들이 더 빛난다. _ '새떼' 부분
![]() |
| ▲ 컴퓨터 속 신경림의 유고를 찾아낸 유족 신병규(오른쪽) 씨와 검토 작업을 거쳐 엮어낸 도종환 시인.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도종환 시인은 1부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시인의 이야기들, 2부에는 길 떠나는 시인의 태도가 연장된 시들을, 3부에는 비우고 버리는 정서가 중심을 이루는, 4부에는 이웃의 아픔을 같이 울어주고 분노하는 시편들을 모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시인은 예전에 자주 떠났던 그 길을 다시 가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졌어도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본다고 술회한다. 소백산으로, 몽골 초원으로 별을 찾아 가도 별 사이에서 지나온 길과 그리운 사람들을 본다.
도종환 시인은 선생이 지금 이 시국에 살아서 한마디 했다면, 사람들에게 "바깥으로 난 길에 갇히지만 말고 내 안으로 난 길을 돌아보라"고 말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유고시집에는 길 밖으로 나와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세상을 통해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 속에 사는 별들을 통해서/ 나는 다시 길로 들어갔다"고 썼다. 촛불 시위 국면에서는 "이제, 우리 손에는 낫 대신 몽둥이 대신 촛불이 들렸다./ 쇠파이프 대신 짱돌 대신 촛불이 들렸다.// 우우 달려가고 우우 쫓겨 가는 대신 손에 손을 잡고/ 내일의 꿈을 노래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면서 "동학년과 기미년이 사일구와 오일팔이 그리고 유월혁명이/ 온통 손을 잡았"다고 '원무圓舞'를 그린다.
시인의 막내아들 신병규 씨는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시를 쓰고 싶다, 써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다"면서 꼼꼼하게 퇴고를 거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알기에 가족들이 만류했다고 고인의 마지막 여정을 소개했다. 도종환 시인은 "휼륭한 시인들이 많지만 대략 노쇠해지면 긴장감과 완성도가 떨어지는데 작고 직전까지 한결 같은, 좋은 시들을 남겨주셔서 참 고맙다"고 말했다. 시인이 묻어둔 연애시 한 편.
머리칼에 나부끼는 장미 꽃잎만 보면서/ 어깨 위를 떠날 줄 모르는 꾀꼬리 소리만 들으면서/ 사람들 사이에 오직 너만이 보이면서/ 치맛자락에 맴도는 싱그런 바람 소리만 들리면서// 종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마을을 덮은 들꽃들도 보지 못하고/ 자맥질하는 오리떼도 보지 못하고/ 멀리 산절의 종소리도 듣지 못하고// 초여름 별밤이 네 하얀 손으로만 가득해/ 네 해맑은 숨결 네 웃음만으로 가득해/ 걷고 또 걸으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서쪽 하늘을 물들인 저녁놀도 보지 못하고// 그해 초여름, 내 그해 초여름 _ '그해 초여름'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