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그러니 시여, 제발 나를 덮어다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2025-09-12 13:45:33
시업 60년 기념 시선집 '너에게 쓴다' 펴낸 천양희 시인
지친 삶 위무하는 짧은 시로 긴 여운 남기는 61편 수록
시는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전자사막' 속 오아시스
"가장 큰 적은 동어반복, 낯선 곳 찾아 나그네 될 터"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_ '너에게 쓴다' 전문
 

▲ 60년 동안 전업시인의 길을 달려온 천양희 시인. 시를 대하는 태도가 수도승과 닮았다. [KPI뉴스 자료사진] 

 

천양희 시인이 등단 60주년을 맞았다. 1965년 박두진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수도승처럼 시에 헌신해왔다. 그 기념으로 그동안 써 온 작품들 중에서 짧은 시를 선별해 '너에게 쓴다'(창비)를 펴냈다. 그가 써 온 대상인 '너'는 어린 시절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피붙이이기도 하지만,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기도 하다.

'너'에게 쓴 마음이 쌓여 일생이 되었고, 이제 풍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쓰는 일생은 수많은 밤 각고의 조각 끝에 시가 되었고, 그 시들은 많은 이들을 위무했다. 그는 '나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은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 짧지만 긴 여운을 보내는 것'이라면서 '단 한 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시인의 말'이라고 썼다.

이번 시집에는 울림이 큰 짧은 시 61편을 수록했다. 시인은 '일상에서 일생까지/ 울음에서 웃음까지/ 슬픔에서 기쁨까지/ 머리에서 가슴까지/ 먼 길 돌아와// 자연이/ 새봄을 펼쳐 보이듯 참으로/ 한 순간을 눈부시게 하는 것이/ 짧은 시였으면 했다'고 모두에 적었다. 그는 "이 길을 60년 동안 힘겹게 걸어왔는데 독자들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지친 일상에서 긴 시를 읽기는 힘들 테니 짧은 시로 긴 여운을 보내고 싶어 서둘러 골라낸 것"이라고 말했다.

-시업 60년, 소감이 어떠신가.
"사람의 나이가 예순이면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인데, 시에는 나이가 없어서인지 순해지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불혹(不惑)도 없고 이순도 없다. 어디든지 혹해야 하고 또 귀를 열어야 한다. 시인으로 60년을 걸어왔는데 무엇을 어떻게 독자에게 전할 수 있을까,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벌새는 일초에 아흔번이나/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칠십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_ '벌새가 사는 법'


'피그미 카멜레온은 죽을 때까지/ 평생 색깔을 바꾸려고/ 일 제곱미터 안을 맴돌고/ 사하라 사막개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이를 찾으려고/ 집에서 이백 미터 안을 맴돈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생 시를 찾으려고/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아야 하나' _ '맴돌다'

-시에 대해 언급한 시들이 많다. 
"시는 곧 삶이고,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업시인으로 60년을 살아온 자의 고백일 수 있다. 시를 도구나 목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시란 목적이 아니고 과정이다. 과정이 탄탄할 때 완성도도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고통 없이는 무엇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을 늘 가슴에 매달고 있다. 제 시가 그냥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시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자유당 때부터 '춤 권하는 사회' '술 권하는 사회' '부동산 권하는 사회'들을 살아왔다. 사람들이 감정이 메말라 마음이 강퍅해지고 서로를 적처럼 여긴다. 시 권하는 사회야말로 절실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낙타가 오아시스에서 물 한 모금 목을 축이듯, 우리가 사는 이 전자사막 속 오아시스가 시라고 생각한다."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 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_ '교감'

-사물이나 사람과 이렇게 겹쳐 떨리는 경지야말로 시의 길 아닌가.
"맞다. 제가 추구하는 그 길인데, 아직까지 먼 것 같다. 늘 얘기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시의 길이고 시인의 길이 아닐까. 굽이굽이 첩첩산중에 있고,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나타날 듯 나타나지 않는 숨은 길이다."

 

'꽃봉오리 아이 눈망울 같고/ 여린 잎들 아이 손가락 같아/ 사람들은 꽃을/ 천사의 시라 불렀을 것이다/ 신이 쓴 스테디셀러라 말했을 것이다/ 누구도 대신 쓸 수 없는/ 절창의 무궁(無窮) 시집// 꽃장을 넘기며 바람이 운다/ 꽃장을 덮으며 새들이 운다' _ '천사의 시'

-인간이 대신 써줄 수 없는 '천사의 시', 그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온 셈이다.
"천사의 시는 인간이 쓸 수 없지만, 인간이 천사의 마음을 빌려서 쓴 거나 다름없다. 우리가 아무리 잘나고 지위가 높더라도 꽃 같고 산 같고 물 같고 하늘 바다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떤 때는 참 건방진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절창은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다. 절창은 가장 고통스럽게 정직할 때 나온다."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_ '자화상'

-돌아보니 허상을 좇아 왔는가?
"허상으로 살아온 건 아닌데, 진실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혼자 안타까워하고 애쓰고 눈물 흘린 적이 많았다. 그래서 저를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살아온 문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런 생활을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 같다."

'고통이 바뀌면 축복이 된다기에/ 그 축복 받으려고/ 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절망을 씹다 뱉고 희망을 폈다 접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외면할 수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_ '축복'

-외면할 수 없는 그 삶이 바로 축복이었다는 대긍정의 시기에 도달한 것 같다.
"맞다. 긍정의 세계에 와 있다. 늘 불화의 세계에서 헤매었는데, '마음의 수수밭'(1994년 펴낸 시집 표제)을 쓰고 난 이후로는 친화의 세계로 나아간 것 같다. 젊어도 봤고 또 늙어도 보고 그랬는데, 이제 비로소 인생에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으니 늙음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긍정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 어두운 젊은 시절을 지나 비로소 대긍정의 시기에 접어든 천양희 시인. [천양희 제공]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_ '들'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편으로 맨 앞에 수록한 '들'을 꼽는 이유는?
"들에는 더는 올라갈 길도 내려갈 길도 없다. 어떤 욕망도 좌절도 없는 그런 세계이다. 들은 늘 품을 내준다. 젊을 때는 그 욕망 때문에 산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중년에는 깊이에 대한 관심으로 물에 대한 시를 많이 썼는데 요즘은 높이도 깊이도 아닌 넓이에 대해 쓰고 그걸 주제로 삼고 있다. 넓은 품을 지닌 들은, 넓이밖에 없는 늙음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천양희 시인은 다음 계획을 묻는 질문에 "시의 가장 큰 적인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낯선 곳을 찾아 구경꾼이 되고 나그네가 되어야겠다는 것"이라면서 "늘 있는 곳에서는 동어반복하기 쉽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궁극의 시를 향한 그의 갈망은 끝이 없다.

'시(詩)는 내 자작(自作)나무/ 네가 내 전집[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_ '후기(後記)'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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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조용호 / 문화부 문학전문기자

소설가, 문학전문기자. 일간지에서 30년 가까이 주로 문학전문기자로 일함. 1998년 '세계의문학'에 단편소설 발표.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 한무숙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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