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전세 사라진 세상은 행복할까

안재성 기자 / 2023-05-19 16:52:11
'월세' 최대 경쟁자는 '전세'…전세 폐지시 월세 폭등 불가피
30평대 아파트 월세 300 넘을 수도…서민 돈 모으기 힘들어
동로마 제국(서기 395~1453년)은 7세기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661~750년)의 습격으로 멸망할 뻔한 위기를 넘긴 뒤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군관구제(테마제)를 도입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 등 중심부를 제외한 국토 전체의 절반 가량에 여러 개의 군관구를 설치한 뒤 각각 장군을 임명해 관리를 맡겼다. 군관구 내에서는 대토지 소유를 불허했다. 자영농을 육성해 병력 자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장군들은 평소 병력을 키워 국경 지대에서 적의 습격을 막았다. 큰 전쟁이 벌어지면 여러 장군들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황제 휘하에 모여 싸웠다. 

군관구제 도입 후 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고 영토와 국부가 점점 커졌다. 바실리우스 2세(958~1025년) 집권기는 흔히 동로마 최전성기로 알려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483~565년) 집권기보다 오히려 더 부강했다고 한다. 

다만 군관구제에도 단점은 있었다. 각 장군이 강력한 무력을 거느리다보니 제위를 노린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 거듭되는 반란에 지친 동로마 황실은 군관구를 해체하고 해당 지역에서 대토지 소유도 허락했다. 

하지만 군관구를 해체하니 군사력이 약해졌다.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한 뒤 동로마 제국은 쇠퇴기로 접어든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 제도의 수명이 다한 듯하다"고 밝힌 뒤 전세 제도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머리를 들고 있다.

분명 전세 제도는 전세사기, '깡통 전세', 갭투자(전세를 끼고 주택 구매) 유행으로 인한 집값 상승 등 여러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세가 사라진 세상이 행복할까. 전세를 한국에만 있는 제도라 폄하하면서 단점에만 주목하기보다 장점도 봐야 한다. 

▲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와 시민사회대책위 회원들이 지난 15일 국회 본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전세는 단지 갭투자로 집을 사는 집주인에게만 유리한 제도가 아니다.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세입자에게도 크게 유리하다. 주거비를 아낄 수 있으니 세입자는 그 돈을 생활비에 보태거나 저축을 통해 자산을 늘릴 수 있다. 전세로 살다가 집을 사는 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재테크다. 

이은형 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만약 월세만 존재한다면 월 수입의 상당 부분이 주거비로 소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월세의 가장 큰 경쟁자는 전세다. 전세가 사라질 경우 세입자는 월세밖에 택할 수 없기에 집주인들이 월세를 더 올릴 수 있다. 

전세 제도가 없는 타국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미국 뉴욕이나 LA에서 30평대 아파트 월세가 300만 원 이하인 경우는 거의 없다. 500만 원을 넘는 경우는 흔하고 1000만 원을 넘기도 한다. 뉴욕에는 연봉 2억 원임에도 월세를 감당 못해 캠핑카에서 사는 직장인도 있다. 

캐나다 역시 대도시의 30평대 아파트 월세가 보통 250만~350만 원 수준이다. 밴쿠버 중심부에서는 원룸 월세가 100만 원에 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세 대신 월세를 택할 경우 세입자 부담은 상당하다. 잠실 트리지움 아파트 전용 84㎡ 매도 호가는 22억 원인데, 월세 호가는 보증금 5억 원에 월 210만 원이다. 

다른 나라처럼 보증금을 3개월치 월세 정도로 조절하면 월세가 500만 원을 넘을 것이다. 전세가 사라진 후 월세가 더 뛸 가능성도 높다. 집값이 지금보다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이래서야 서민들이 어느 세월에 돈을 모아 자가를 마련할 수 있을까. 버는 돈 대부분이 주거비로 소요돼 해외여행 한 번 가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뉴욕처럼 서울 한복판 캠핑카에 사는 억대 연봉자가 나올 수도 있다.  

전문가들도 전세 폐지에 부정적이다. 이 위원은 "전세는 집주인보다 세입자에게 오히려 더 유리한 제도"라며 "선진국처럼 월세가 일반화돼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세사기 잡으려다가 군관구제를 폐지한 동로마 제국처럼 더 큰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원 장관이 명심해야 할 점이다. 

▲ 안재성 경제산업 에디터. 

KPI뉴스 / 안재성 기자 seilen78@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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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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