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고참' 루카셴코, 동병상련 위로하며 '천기누설'

김당 / 2022-09-28 15:46:33
소치 회담서 "러시아인 3만~5만명 탈출" 언급해 탈출 러시 공식화
"이런 말 죄송하지만"…곤경 처한 푸틴에 외교 결례이자 '천기누설'
루카셴코, 독재 경력은 6년 선배…서방-러시아의 '완충국' 이점 누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원령 발령 이후 러시아에서 3만~5만 명의 사람들이 탈출했다"며 "도망 가게 놔두라"고 조언한 것으로 밝혀졌다.

▲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왼쪽)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동원령 발령 이후 러시아에서 3만~5만 명의 사람들이 탈출했다"며 "도망 가게 놔두라"고 조언한 것으로 밝혀졌다. [러시아 대통령실 제공]

UPI뉴스가 러시아 대통령실 누리집에 게시된 러-벨 정상회담 보도자료를 확인해 보니, 루카셴코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러시아 휴양지 소치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그들이 머문다고 한들 우리 편을 들겠냐"며 이렇게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루카셴코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우리는 2020년에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고, 러시아는 오늘 그것을 직면하고 있다"며 "이 폴트 라인(fault line)은 누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원래 지진이 발생하는 지각판의 접촉면을 뜻하는 용어인 '폴트 라인'은 통상 '단층선' 또는 '충돌선'으로 번역되지만, 직역하면 '결점 노선'이나 '오류 행렬'로 번역할 수 있다.

동병상련의 위로라지만 "3만~5만 명 탈출" 언급해 탈출 러시 공식화

루카셴코의 발언은 이날 해외 언론에 보도된, 러시아를 탈출하기 위해 조지아(그루지아) 국경 검문소에 길게 줄을 선 행렬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푸틴에게 "당신은 이것(폴트 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2020년에 수천 명이 벨라루스를 떠났을 때 별로 속상하지 않았다"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전했다.

그러면서 "(2020년에 떠난) 그들 대부분은 지금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있다"며 "이(폴트라인) 사람들도 돌아올 것"이라고 푸틴을 위로했다.

지난 2020년 당시 벨라루스에서는 루카셴코의 6번째 집권에 반대하는 벨라루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정부의 무력 진압과 탄압을 받은 시민들이 대거 벨라루스를 탈출했다.

이에 유럽연합(EU)은 선거의 정당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하며 시위대에 대한 탄압과 폭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루카셴코가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손을 내민 유일한 우군이 푸틴이었다.

▲ 막사 테크놀로지스가 제공한 위성 사진에 27일(현지시간) 러시아-조지아 국경의 어퍼 라스 검문소를 향하는 러시아 사람들과 차량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부분 동원령 발표 후 러시아를 탈출하는 사람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AP 뉴시스]

문제는 러시아 당국이 '탈출 러시'를 금기시한 가운데 동맹국 수반이 먼저 폴트 라인을 거론하며 "러시아에서 3만~5만 명의 사람들이 탈출했다"고 기정사실화한 점이다.

'푸틴의 입'인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이날 국경 봉쇄 가능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현재로서는 결정된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이처럼 동맹국의 국민들이 조국을 떠나는 난감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먹이며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외교 결례이자 '천기누설'인 셈이다.

루카셴코도 이를 의식한 듯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해서 죄송하다(Sorry for openly saying this)"면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쨌든 볼셰비키 혁명 때처럼 유럽이나 미국으로 도피하지 않고 여기서 합의를 볼 수 있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덧붙였다.

루카셴코의 호언과 달리 이웃 라트비아는 '국경 폐쇄 비상사태' 선포

과연 그럴까? 루카셴코의 낙관적인 위로와 달리 푸틴의 동원령을 피해 탈출하는 러시아인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러시아와의 국경을 폐쇄하는 국가까지 등장했다.

AP 통신은 27일(현지시간) "동원령은 러시아에서 거의 20만 명의 탈출과 반전 시위를 부채질하며 폭력을 촉발시켰다"면서 "러시아 남성들이 도주하는 목적지 중 하나는 카자흐스탄인데, 지난 한주 동안 약 9만8000명이 이곳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또 다른 주요 탈출 경로인 조지아(그루지아) 국경 검문소에서는 러시아 징병 관리들이 징병 통지서를 발행하면서 동원 예비군 동원 대상자를 가려내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약 5500대의 차량이 국경을 건너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베르크니 라스 검문소에서는 징병 관리들이 징병 안내문을 배포했다.

유럽연합 국경 및 해안경비대는 지난 19일부터 25일까지 러시아 시민 6만6000명이 27개국 블록에 진입했으며 이는 지난 주에 비해 30% 증가한 수치라고 밝혔다.

▲ 라트비아 정부가 28일부터 3개월간 러시아 국경을 봉쇄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발표하며 27일(현지시간) 게시한 사진 [라트비아 정부 누리집]

이런 가운데 러시아-벨라루스와 접경한 라트비아 정부는 28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동원령으로 인해 러시아를 떠나려는 러시아인이 급증해 국경 교차점과 공항, 항구, 철도에 28일부터 3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이날 공식 발표를 통해 "현재 라트비아와 러시아 국경의 상황은 안정적이고 엄격한 통제 하에 있지만 러시아에서 동원령이 발표되면서 자국을 떠나려는 러시아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어 "따라서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에서 불법 이민자 수가 급격히 증가할 위험이 있다"면서 "비상조치의 목적은 이에 대한 선제적 대비"라고 발표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또한 러시아 시민의 이동을 더욱 줄이기 위해 페데체 국경을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이미 감시를 강화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국경 봉쇄를 하기 전에 접경 국가가 먼저 국경을 선제적으로 봉쇄함에 따라 러시아의 대외 입지는 더욱 고립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이자 유럽-러시아의 마지막 완충국

푸틴의 입장에서 벨라루스는 서방과의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우호적인 완충국이다.

▲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지난 26일(현지시간) 동원령 발령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소치에서 만났다. 1994년에 집권한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루카셴코는 독재 경력으로 따지면 2000년에 집권한 푸틴보다 6년이나 '선배'다. [러시아 대통령실 제공]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인 루카셴코는 수년동안 러시아와 서방이 서로 경쟁하는 것을 통해 EU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한편으로 러시아에 값싼 석유와 가스를 요구하는 등 완충국으로서의 이점을 누려왔다.

그러면서도 루카셴코는 지난해 5월에도 유럽연합(EU)의 벨라루스 여객기에 대한 제재조치에 반발해 아테네발 민항기를 강제 착륙시켜 미-러 정상회담을 앞둔 푸틴에게도 골칫거리가 된 바 있다.

이번 소치 정상회담은 동원령 발령 이후 푸틴이 처음 갖는 정상회담이어서 주목을 끌었는데, 결과적으로 푸틴의 기대를 저버린 셈이다. 또한 사전 예고 없이 회담이 열린 탓에 일부 외신은 소식이 알려진 직후 회담 장소를 모스크바로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

루카셴코는 이번에도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해서 죄송하다"면서도 푸틴의 아픈 곳을 콕 질러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했다.

1994년에 집권해 28년째 대통령직에 있는 루카셴코는 반대파를 잔학하게 숙청하는 독재자로 악명높다. 독재 경력으로 따지면 루카셴코는 2000년에 집권한 푸틴보다 6년이나 '선배'다.

K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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