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차, 1899년 개통…1968년까지 시민의 발
도시 시공간의 근대적 재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일제 때부터 교통지옥 대명사…매달려 가다 다치기도
서울시가 다음 달부터 위례선 트램(노면 전차) 본선 시운전에 들어간다고 26일 밝혔다. 실제 운행할 구간에서 시험 운전을 하며 연말 개통을 위한 막바지 검증을 하는 작업이다.
위례선 트램 구간은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천역과 8호선 복정역·남위례역 사이며 길이는 5.4㎞이다. 이 트램이 개통되면 58년 만에 서울에서 전차 운행이 부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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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부터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는 전차 381호. 1930년경 일본에서 제작돼 서울 시내에서 실제로 운행된 전차다. 전차 옆 조각상은 도시락을 두고 전차에 탄 아들에게 어머니가 도시락을 전하려 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서울에서 전차는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5월 17일 개통됐다. 그 후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쳐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 11월 29일 마지막 운행을 할 때까지 69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발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전차는 단순한 대중교통 수단 이상의 존재였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을 근대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전차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한국 근현대사의 풍경이 담겨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최초로 개통된 전차 노선은 돈의문(서대문)~종로~흥인지문(동대문)~청량리였다. 기점과 종점을 그렇게 정한 데는 사연이 있었다.
처음에 기점으로 예정된 곳은 숭례문(남대문)이었다. 이를 돈의문으로 바꾼 것은 한국 최초의 철도로 1900년 전 구간이 개통되는 경인철도의 시발·종착역인 경성역이 그쪽에 들어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울역에 해당하는 서울 철도의 중심지가 숭례문 쪽이 아니던 시대의 풍경이다.
청량리를 종점으로 한 것은 명성황후 능묘인 홍릉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이는 적잖은 비용을 수반했다. 이에 주목한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가 저렴하고 편리한 이동 수단이라고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전차 부설이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전차의 역사는 불공정 계약에서 비롯된 문제점도 보여준다. 전차 사업을 담당한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고종 쪽과 콜브란 등이 합작해 세운 기업이었다(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명칭 변경). 민간 회사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 거액의 대한제국 황실 자금이 투입돼 있었다.
그럼에도 운영의 실권은 콜브란 쪽에서 쥐고 있었다. 계약 조건이 미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돼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 회사를 인수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더 강화하려 했다. 1909년 콜브란 쪽은 일본 기업에 이 회사 지배권을 넘기고 큰돈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고종은 매도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전차 도입과 정착 과정에서 사건·사고도 적지 않았다. 개통을 앞두고 전차 송전선을 절단해 가져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2명이 재판 없이 참형을 당했다. 개통된 달에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성난 군중이 일본인 운전사를 폭행하고 전차를 불태운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취객이 전차 선로를 베고 잠들었다가 화를 입는 등의 사고가 이어졌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전차 노선은 점점 늘어났다. 대한제국 시기에 4개였던 서울의 전차 노선은 일제 강점기 말인 1943년에는 16개(지선 포함)가 됐다.
전차 노선 확대는 한양도성 일부 성문과 성벽의 훼손을 초래했다. 전차 노선을 따라 새로운 상업 중심지 등도 형성됐다. 그러면서 서울(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은 전근대에 한양도성 중심이던 것과는 다른 공간 구조를 갖춘 근대적 도시로 변모해갔다.
전차는 교통지옥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인구가 100만 명에 못 미치던 일제 강점기에도 그러했다. 전차가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던 1930년대에는 '30분 이상 기다려야 겨우 전차를 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30년대 후반 신문에는 '전차에 타려는 사람이 러시아워에 구름처럼 모여 난리다' 등 교통지옥 문제를 다룬 기사가 심심찮게 실렸다. 만원 전차에 매달려 가거나, 매달려 탈 수도 없어 걸어가는 학생들 모습을 언급한 기사도 있다. 만원 전차에 매달려 가던 여학생이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도 발생했다.
사람으로 가득한 전차 내부도 문제였다. 소매치기, 절도, '에로 범죄'가 활개를 친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에로 범죄'는 여성 대상 성범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풀이된다. '만원 전차는 범죄 온상'이라며 경찰이 전차 운영사인 경성전기주식회사(이하 경성전기)에 대책을 요구했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교통지옥에서 시달리는 동안 경성전기는 호시절을 보냈다. 경성 일대의 전차는 물론 전기, 가스까지 독점 공급하며 이윤을 극대화한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잘나가던 시절 경성전기의 위세를 보여주는 건물이 서울에 남아 있다.
200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이 그것이다. 1928년 경성전기 사옥으로 준공됐는데, '국내 최초의 근대적 오피스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 최신식 건물이었다. 1961년 정부가 경성전기를 조선전업, 남선전기 등과 통합해 한국전력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 전신)를 발족하면서 경성전기 사옥에서 한전 사옥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에도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전차는 점차 버스에 밀려나 1968년 서울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전차 노선 확대와 맞물려 변형된 서울의 도시 구조는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고, 전철 노선은 과거 전차 노선과 상당 부분 겹친다. 서울 시민들은 여전히 전차 전성시대의 유산 위에서 살고 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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