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2년 미국 헐리웃 영화를 통해서였다. 두 남녀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랑을 이어나가는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또 세렌디피티란 단어가 스리랑카의 옛 지명 '세렌디프'의 설화 '세렌디프의 세 왕자'에서 유래됐다는 어원도 여기서 말하려는 주제는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발견의 기쁨'이 사라진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교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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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이미지 [챗GPT 생성] |
AI는 거대한 빅데이터 속에서 일관된 흐름(특징, feature)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10년 치 서울지역 기상 통계에서 섭씨 32도가 넘는 날들이 매년 증가했고, 물가 통계에서 에어컨의 판매량도 늘어났다고 쳐보자. 고온 일수(日數)와 에어컨 매출액 증가 사이에 하나의 규칙이 나온 것이다. 이 규칙에 따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특정 연도의 에어컨 매출액을 예측할 수 있다. 이건 너무 간단한 예였지만 나라 전체의 인구통계에서 다음 선거 결과를 유추한다든가, 주식거래 통계에서 내년도 경기를 전망한다든가 하는 복잡한 AI 추론도 가능해진다.
운전자가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때 내비게이터를 켜는 것처럼 이제 생활의 모든 판단에서 우리는 AI 예측에 의존한다. 여행을 갈 때 숙소와 맛집을 예약하면서 남들이 내린 평점과 분석에 따라 어디로 갈지 정한다. 처음 보는 이성과 데이트를 하려면 AI 데이팅 앱이 알려준 최적의 상대방과 만나게 된다. 더 이상 깜깜이 여행이나 데이트는 없다. 미리 알고 예상된 경로를 따라간다. 확정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을 불투명하다며 혐오한다. 그 종착지는? 늘 가던 식당만 가게 된다. 항상 같은 유형의 이성만 만난다. 예상한 결과에 가깝게 안전한 선택만 한다. 과연 안전할까? 오히려 편식과 편파, 편협이 심해진다. 편(偏)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뜻이다. 확증편향은 믿음의 편식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같은 말과 같은 사고방식만 흡수하다보니 기울어진 신념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균형이 확대된다. 동굴 안에서 목소리가 빙글빙글 돌며 더 큰 메아리를 형성하는 에코챔버 효과가 생긴다. 구성원들이 각각 극단의 확증편향에 빠지면 사회는 두 쪽으로 찢어지고 만다. 양극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서로를 증오하는 극단의 대치 상태로 분열된다. 바로 21세기 지구촌의 모습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아빠엄마 세대가 경험했던 블라인드 데이트는 뜻밖의 커플을 만들어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남녀가 낯설지만 자신과 다른 개성의 상대방에 끌려 사랑에 빠졌다. 동아리 선배의 괴이한 음악 취향에 물들어 인생이 바뀐 음악인도 많았다. 처음 먹어본 홍어회의 냄새에 구역질을 하다가 최애 요리로 정착한 미식가의 일화는 끝이 없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가려다 미 대륙을 발견했다. 플레밍은 버려둔 시험관에 핀 곰팡이로 페니실린을 발명했다. 발명과 발견의 역사는 뜻밖의 행운과 요행수로 점철돼 있다. 예상치 못한 우연에서 재미와 흥분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뻔히 알던 시나리오에는 하품을 한다. '어, 이게 뭐야'하는 순간 명작이 탄생하는 곳이 과학과 예술의 세계다. 인간의 창의성이란 개념도 뻔한 결말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능력일 것이다. 가수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이란 형용모순의 노래가 있듯, '아름다운 우연'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우주의 섭리이리라.
예측 만능의 AI를 쓸 때 창의적으로 쓰려면 남이 쓰는 방법과 다르게 써야 한다. '아름다운 우연'에 마주쳐야 한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책을 보고 공식처럼 뻔한 질문을 할 게 아니라, 어떻게 물어볼까 고민도 해보고 잘못 물었다가 오답도 경험하고 하는 시행착오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만의 AI 다루기 족보가 쌓여야 한다. 기계적인 AI 도구를 인간답게 창의적으로 쓰라는 얘기다. 그렇게 하려면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기대하며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마구 닥치는 대로 써볼 것을 권한다. AI에게 배울 게 하나 있다. 통찰력 획득이란 행운을 마주치려면 일단 양적으로 풍성하게 시도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주의할 점. AI가 찾아낸 상관관계(co-relation)는 인과관계와는 다르다. 'A 때문에 B가 발생한다'가 아니고 'A가 자주 발생하면 B도 자주 발생한다'는 뜻이다. 즉, A와 B의 출현에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정도다. 다른 말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규칙이 있다는 의미다.
고대 천문학이나 영미 판례법은 이 같은 무한반복 관찰과 경험의 끝에서 통찰을 찾아내는 귀납의 지혜이다. 한방의 천연약재가 아직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완전히 밝혀내진 못했지만 대체로 약효는 인정받는 이유다. 하지만 AI가 쓰이는 현실사회에서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데서 혼란이 온다. 미국 경찰이 사용한 범죄 예측 콤파스 AI가 '흑인은 범죄인'이란 잘못된 결론을 내린 이유는 과거 전과자 통계에서 압도적으로 흑인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자인 흑인이 미국 사회에서 당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같은 사회적, 제도적 맥락도 무시됐다. AI가 잘하는 것, 못하는 것을 구별하고 이 도구를 적절하게 쓰는 요령 또한 인간의 지혜이다. 세렌디피티,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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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5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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