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머리 좋고, 갈색피부 더 좋아" 이래서 배우
한석규-설경구-천우희 각자가 주인공인 영화 신선
"해 본 적 없는 모습, 너무 좋죠".
오십대 배우가 노랑머리에 태닝 갈색피부를 하게 됐다고 신났다. 영화 '불한당'에서 본 적 없는 '섹시카드'를 꺼내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오더니 이번 '우상'에서도 새로운 모습이다. 배우 설경구 얘기다.
영화 '우상'의 개봉을 앞둔 배우 설경구를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설경구가 맡은 배역은 이 시대 우상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구명회(한석규 분) 가족에게 아들을 잃은 뒤 불물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유중식이라는 인물이다.

철물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지적장애 아들을 키워 온 아버지, 고단한 유중식의 인생에 기쁨은 아들 뿐이고 아들을 돌볼 사람도 자신 뿐인, 둘 뿐인 삶인데 신혼여행을 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어느덧 성인이 된 아들에게 아내(차화련, 천우희 분)를 만들어 주려고 한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는 아버지. 아들을 살릴 순 없어도 개죽음이 되지 않도록 그날의 비밀을 풀어야겠기에 광기를 에너지로 물불 안 가리고 구명회를 들이받는 불도저를 자청한다.
우선 쉽지 않지만 영화적 매력이 가득한, 영화 '우상' 그리고 유중식을 선택한 이유부터 들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수진 감독이, 이 사람이 왜 이런 선택을 계속하나. 이해가 안 되니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졌어요. 이해가 되면서 시작이 됐죠. 작품 선택이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설득하고 이해가 됐을 때 결정하는 것 같아요. 나를 설득하는 작업입니다."
"사람이 다 다르잖아요. 저라면 (유중식과 구명회와 차화련이 하는) 이 선택을 안 할 것 같아요. 왜 해? 이건 답이 아니야! 이런 의구심이 들었죠. (출연을) 결정한 다음부터는 그렇게 갈 수 있다, 이해가 됐죠. 그래, 중식이 부남이에게 연화를 짝지어 준 순간부터 꼬이기 시작했고 한 번 꼬이니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선택들을 해나가는 거죠."

설경구는 극중 자신과 아들의 이름이 그 이해의 시작점이었다고 덧붙였다.
"고단한 중식, 아침 굶고 1분 안에 쳐 넣어야 하는 점심. 그게 중식의 이름이고 삶이에요. 결혼을 시켜서 유부남을 만들고 싶은 마음, 그게 아들 부남이 이름이고요. 이름에도 뭐가 있어요."
노랑머리에도 이유가 있고 뜻이 있었다.
"둘뿐이니까 중식이가 에코 설비 하는 현장에 데려갔는데 잃어버릴 수 있어요. 근데 부남이는 아빠에 대해 설명을 못 해요. 머리 색깔로 말하는 거죠, 아빠를. 중식 역시 아들의 시신을 머리색부터 확인하잖아요. 어디 사람 많은 공간에 가도 중식이는 부남이를, 부남이도 아빠를 머리색으로 얼른 찾았을 거예요. 그래서 중식이가 자신도 아들의 머리도 노랗게 한 거죠."
"피부가 거무스름하죠. 감독님께서 태닝 어떠세요? 하시기에, 어휴 저는 좋다고 했죠. 안 해 본 거 하면 좋아요. 또 중식이를 생각하면 속이 새카맣게 타서, 밥도 제때 못 먹고 부남이부터 먹어야 하니까 대충 위속에 처넣고 살았으니, 삶이 그런데 피부가 뽀얄 수 없죠."

'우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람 태도를 요구하는 영화다. 기존의 스릴러나 추적 드라마를 생각해 등장인물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관계를 파악한 뒤 하나씩 실타래를 풀어내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낭패를 맛볼 확률이 높다. 각 인물들이 처음엔 관련 없는 듯 따로 노는 듯해도 결국엔 하나의 지점에서 합류하는 구조로 파악하려 해도 '우상'과 따로 노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각자가 다 자신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고, 실제론 깊은 연관이 있는 관계지만 본인들은 모르고 있거나 꽤나 깊이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딴 밥그릇일 수 있는 그 모습이 영화에 그대로 담겼다. 한석규-설경구-천우희, 이 엄청난 에너지의 배우들을 한 영화에 모은 이유다. 누구도 조연으로 보여서는 안 되는, 각자의 이야기에선 완벽하게 주인공일 수 있는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렇게 보셨다면 감사하죠. 새로운 관람 태도…까지는 아니지만 새롭고 낯설 수 있는 영화예요. 영화가 보편적 순서로 흐르지 않죠."
"세 인물, 각자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에요. 구명회와 제가 둘이 만나 대화를 하잖아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하는데 서로 다른 목적으로 얘기해요. 저랑 연화와도 마찬가지예요. 셋이 만나도 마찬가지고요. (관객이) 어느 한 명을 좇아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도. 또 셋을 묶다 보면 (스토리 구조의) 톱니가 안 맞고 고장이 나거든요."
"저는 감독님께 바람이 세 인물 섞지 말아 달라(였어요). 한 작품에 나오면 안 되는 인물들, 각자 생각하는 것도 목적도 다른 인물들인데 섞기까지 하면(웃음). 괴퍅한 영화예요."

한석규는 '우상'의 새로움을 영화 '초록물고기'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에 대한 회상으로 설명했다. 당시엔 낯설지만 후에 보면 새로운 흐름의 시작점이 되었던 영화. 설경구는 보다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었다.
"영화 어려웠어? 생각을 하면서 보면 어려울 것 같아요. 눈 가는 대로 보시면 좋겠다, 말씀드리고 싶어요."
"구명회는 대중의 인기가 필요한 정치인이에요. 직접 드러내지 않았어도 청와대 시계를 보면 그 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이고요. 저(유중식)는 끊어진 핏줄을 잇고 싶은, 내것이 아닌데 갖고 싶은 인물이죠. 여럿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으면 안 그랬을 텐데 나밖에 모르니 욕심을 내요. 연화는 살고 싶은 거예요, 중국 아니고 한국에서 살아 있어야 사는 거예요. 각 인물의 목적들은 단순하고 그걸 향해 잘못된 선택들을 해 나가요.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하시면 영화를 좀 더 재미있게 보시지 않을까 싶어요. 억지로 섞어 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부탁 드리고 싶고. 좀 새로운 영화죠, 찢어져 있다가도 하나로 합해져 끝나는데 이건 다 다른 선택을 하며 끝나니까요."

선배 한석규로 화제를 바꾸니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이수진 감독님, 촘촘하게 얽힌 책, 한석규가 제 출연 이유예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우상이에요, 했는데 우상은 아니지만 롤모델이었습니다. 요새는 여러 배우가 있지만 1990년대 말에는 오로지 한석규 혼자 버텼던 기간이 있어요. 그 사람 보며 배우의 꿈을 품었는데 그런 배우랑 같이 (연기)하면 당연히 너무 좋죠."
"('우상'이) 힘든 현장이었어요. 석규 형이 전체를 아울렀다고 생각해요. 워 워 워 워, 분위기 메이커라고 해야 하나요. 이수진 감독님이 저라는 배우를 '잔뜩 독이 올라서 당장 링 위에 튀어 올라갈 것 같은 배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형의 공이 큽니다."
"그나마 제가 하나 한 게 있다면 기존에 이런 등장은 없었다…. 전사도 없이 아들 죽음 확인하러 '빠 악!' 들어갔으니까요. 보통 준비가 된 상태에서, 이 인물의 이전 얘기들이 풀어진 상태에서 들어가는 신이 많잖아요. '뭐야, 왜 그래' 하면서. 그런데 이번엔 점차, 점차 하다가 (절정에) 오르는 게 아니고 이미 정점에서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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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경구는 영화 '우상'에서 가장 센 장면을 촬영 첫 날 연기했다. 명장면의 탄생! [CGV아트하우스 제공] |
첫 등장에 대한 생각이 많았고 감회가 컸나 보다. 얘기는 자연스레 선배 한석규에서 설경구 자신에게로 넘어왔다.
"첫 등장이 제 첫 촬영이었어요. 이수진 감독님 스타일 모르잖아요, 그때 전체를 파악했고(웃음). 스물 몇 테이크를 갔고, 원 신 원 컷 오케이. 자, 맡길게."
첫 촬영 이후 이수진 감독에게 모든 걸 믿고 맡겼다는 배우 설경구.
"첫 등장이 제일 신경 쓰였고 너무 파격적이어서 좋았지만 쉽지 않았어요. 얼굴도 안 보여주고, 누나한테 소리는 지르지만 안 보여주고, 그러다 풀샷으로 보여 주는 장면. 잘 찍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느닷없이 차 몰고 가다 후진하는 격의 장면이니까요. 긴장했어요, 차분하면 안 되고 너무 꼭지로 올라가도 안 되고 수위 조절도 해야 하고. 석규 형이 (좋은 장면 한다고) 부러워했어요."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이 맡겨지니 긴장하면서도 쾌감을 느끼는 설경구나 그게 배우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알고 부러워하는 한석규나 역시 '천상 배우'이다. 설경구는 분노 폭발의 지점에서 짐승처럼 포효하기보다는 마치 아이처럼 몽니를 부렸다. 그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동반한 분노가 묘하게 더 슬프고 더 처절하다.
"저 중식이 속에 부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누나 동숙이랑도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부남이랑 둘이 전부예요. 철물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미러볼 틀어놓고 노래하고 같이 춤추고 친구같이 살아온 거죠. 실제로 촬영할 때 밤새 춤추고 노래했는데 (편집됐지만) 부남이가 저를 때리는 것도 있어요, 그만큼 친구 같은 사이예요. 그렇게 한 몸처럼 살아와서 어느 순간 중식이 속에서 툭 부남이 튀어나올 수 있다고 봤습니다."
"시신 확인한 중식이가 '부남이 아니에요' 할 때, 그냥 아버지 중식이라면 멱살 잡고 밀어붙이거나 휴대전화를 던지거나 했을 텐데 그때 부남이가 나온 거예요,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가. 그래서 중식은 뒷걸음치며 아니라고 현실을 부정하죠, 내지르기보다 웅크려 앉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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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상'은 지난 2월 열린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
설경구와의 인터뷰에는 두 사람이 함께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배우 설경구 그리고 목숨보다 귀한 부남이를 평생 키워 온 아버지 유중식 씨.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 것 같아요. 서로 얘기할 때 톤도 (여느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중식이가 부남이처럼 내고, 목소리도 서로 아기처럼 하며 같이 놀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부남이가 장애가 있다 보니 그 세월이 길었죠. 그래서 분노했을 때 아이 같은 부남이가 나오는 거죠."
"불안감, 뭔가 안정되지 못한 분노는 부남이가 중식이 안에 있어 가능했다고 봅니다. 중식에게도 결핍이 있고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고. 뭔가는 해야겠는데 방법을 모르니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선택을 강요받고 그런 거죠, 물론 아기를 갖고 싶으니 모든 게 시작됐지만요. 애기들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불안해 하잖아요, 그런 모습이에요. 폭발해서 때리고 그럴 때 더 부남이처럼 하려 했어요, 분노보다는 애기가 화나는 것처럼."
"그래도 유중식은 뜨겁게 시작했다가 아, 내가 병에 걸렸구나, 몹쓸 병에 걸렸구나 스스로 알게 되는 사람이죠. 답도 못 찾고 죽은 연화가 있고 계속 폭주하는 명회가 있는데 그에 비하면 중식은 답을 찾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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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가 무색할 만큼'이 아니라 나이들수록 멋있어지는 배우 설경구 [CGV아트하우스 제공] |
1993년 연극 '심바새매', 1996년 영화 '꽃잎'을 말하지 않아도 "나 돌아갈래"의 명연기로 각인되는 영화 '박하사탕'(1999)이 벌써 30년 전이다. 30년이 지났는데 새롭게 멋있어지는 비결이 뭘까.
"제가 멋있는 건 아니지만 멋있음을 계속 연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복제하고 싶지는 않고요. 결국 제 얼굴이긴 할 텐데 겹쳐지는 얼굴이면 하고 싶지 않아요. 탈색하라 해서 너무 좋아해 태닝까지 해야 하니까 더 좋아, 물론 저지만 저의 자기만족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연기해 가고 있습니다."
"사실 멋있음은 제가 했던 표현법은 아니에요. '불한당' 변성현 감독의 도움이었어요. 연기의 터닝포인트가 됐는데. 그렇게 모든 영화를 하겠단 것은 아닌데 그쪽도 생각하게 됐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몰입한다고 해서 그 인물이 됐다고 못 해요, 설경구가 하는 거니까. 하지만 각을 틀면 더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할까요. 그 뒤 연기에 대해 생각 많이 하게 됐습니다."
"변성현 감독과 다시 만나 영화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를 이번 달 말부터 합니다. 제가 좀 부끄러운 얘긴데 변 감독한테 '멋있게 찍어 줘' 했어요. 그랬더니 변 감독이 '변했나? 인간이' 하더라고요. 변 감독이 '불한당' 때 멋있어야 한다고 강요했는데, 너무 부담이었어요. 멋 부리고 연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개 이렇게 들어 줘라, 저렇게 돌려라 주문하는데 미쳐 버리겠더라고요. 근데 어느 순간 내가 알아서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이번엔 변 감독이 시크하게 얘기하더라고요, '노력해 볼게요'."
나이 들어 멋있어지는 건 연기력만으론 힘들다. 잘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 한 명의 멋있는 배우 설경구, 지금도 멋지고 앞으로 더 멋있어질 천우희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영화 '우상'은 바로 내일, 3월 20일 관객맞이를 시작한다.
KPI뉴스 / 홍종선 기자 dunasta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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