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크 자유화 모델 넘어 금융진화 반영 새로운 제도설계 필수
스테이블코인 커질수록 중앙은행이 최종 신뢰 형성자 역할 수행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와는 어떤 관계일까.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한 하이에크는 탈국가적 통화 경쟁을 구상했다. 하이에크는 이를 중앙은행의 통제에서 벗어난 민간 통화 경쟁으로 보았다. 민간 통화 발행자는 스스로 가치 안정성을 약속하며 경쟁하고 시장은 최적의 통화를 선택하게 된다. 통화 공급은 발행자의 평판과 시장의 수요에 의해 자율적으로 조정된다. 국가가 아닌 시장이 신뢰를 형성한다. 하이에크에게 통화란 본질적으로 민간 발행, 시장 경쟁, 평판 기반의 시스템이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러한 하이에크의 구상을 일정 부분 계승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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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테이블코인 제도 설계 관련 이미지. [챗GPT 생성] |
스테이블코인은 표면적으로 보면 하이에크적이다. 민간이 가치를 고정(peg)하여 발행하고 사용자는 이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며 발행 주체 간에 경쟁이 있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의 실체적 구조를 들여다보면 하이에크의 통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 엿보인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가가 발행한 법화(legal tender)에 기반한 준비자산을 보유해야만 안정성을 유지한다. 즉 독자적인 통화라기보다는 파생적인 통화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민간 통화에 대한 시장 신뢰를 상정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에 의한 기술적 신뢰, 규제에 의한 제도적 신뢰, 준비자산에 의한 재무적 신뢰 등 구조를 요구하고 있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복합적 신뢰 구조를 상정한다.
그러면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를 넘어서는 제도설계를 필요로 하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적 순수 시장 모델만으로는 안전하게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스테이블코인은 통화 공급자 경쟁이라기보다는 결제 인프라 장악 경쟁이라 할 수 있다. 즉 통화 자체의 경쟁이 아니라 플랫폼 경쟁인 것이다. 플랫폼 경쟁은 승자독식 경향이 강하기에 하이에크가 상정한 다수 발행자의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의 안전성은 민간의 선의(good faith)로만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이에크 모델은 평판이 제도적 안정성을 대신할 것으로 보았지만 시장만으로는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어렵기에 제도적 규율이 필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넘는 자본이동, 국가의 통화 주권 문제 등을 촉발할 수 있는데 하이에크 모델은 통화안정, 금융안정, 자본 유출입 관리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울러 토큰화된 금융 시스템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시스템 위험(systemic risk) 요인이 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흔들리면 전체 디지털 금융 인프라가 동시에 흔들리게 된다. 하이에크는 통화 발행자의 파산이 전체 금융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적 자유화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제도설계를 필요로 한다. 이는 하이에크의 패배라기보다는 디지털 시대의 통화가 기술, 제도, 시장 신뢰를 결합한 복합 구조를 요구하며 새로운 금융 진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에크를 넘어서는 제도설계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자유시장과 공공성과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금융을 단순한 자본 흐름이 아니라 책임 구조(responsibility architecture)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기술 혁신의 핵심은 알고리즘 자체보다 거버넌스의 질적 수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술과 금융의 혁신이 공공성과 신뢰를 갖추도록 하는 '설계된 자유(designed freedom)'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 안정을 설계하고 신뢰를 관리하되 혁신을 장려하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려면 '보이지 않는 공감(sympathy)의 룰'이 전제되어야 한다. 금융이 신뢰를 제도화하는 산업이라면 스테이블코인은 신뢰를 암호화한 금융이며 그 신뢰를 제도화함에 있어 규제가 과하면 혁신이 멈추게 되고 규제가 부족하면 시장 신뢰가 무너지게 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하이에크의 시장 규율만으로는 부족한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과 유동성에 대한 룰이 강화되어야 한다. 하이에크가 상정하지 않은 제도적 안전장치로서 발행자 라이선스와 감독체계의 룰이 마련되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넘나드는 특성이 있으므로 하이에크 모델에는 존재하지 않은 국제적 룰의 조화 및 정합성이 필요하다. 보안인증체계 등 기술 네트워크에 관한 룰 또한 요청된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술, 금융, 외환, 결제 인프라가 결합된 시스템 위험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중앙은행 관점에서 거시금융, 외환, 유동성 리스크 등을 제어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금융감독당국 관점에서 발행자 규율, 소비자 보호, 시장구조 관리를 강화하면서 양 당국의 법적, 기술적 협업 체계와 정책 거버넌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앤드류 베일리 영국 중앙은행 총재가 지난달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언급하고 이번 달 영국 중앙은행이 밝힌 대로 시스템적으로 중요한(systemically important) 스테이블코인이 중앙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중앙은행이 최종 신뢰 형성자(trust builder of last resort)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 경우 스테이블코인의 대규모 인출 등 시스템 위기 발생 시 중앙은행의 유동성 제공 조건과 절차 등이 정의되어야 한다.
하이에크는 중앙은행의 통제에서 벗어난 민간 통화를 구상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필연적으로 중앙은행을 최종 신뢰 형성자로 끌어들이는 속성을 갖기에 하이에크를 넘어서는 제도설계의 당위성이 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하이에크의 구상과는 정반대로 민간 통화가 커질수록 오히려 역설적으로 중앙은행 의존도는 높아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를 넘어서는 제도설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일단 발행된 이상에는 시스템의 동요와 붕괴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스테이블코인의 뱅크런은 주류 금융(mainstream finance) 전반으로 즉각 전이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시스템적으로 요동하면 결국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이 필요하게 된다. 요아힘 나겔 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대한 인센티브가 왜곡될 경우 잠재적인 뱅크런이나 시장 변동성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스테이블코인이 끝내 국가의 구제금융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준공공 결제 인프라이며 따라서 새로운 제도설계는 필연적이다. 차기 연준 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적절한 규제 프레임워크로 금융안정 우려를 해소해야 함을 강조했다. 스테이블코인은 겉으로는 민간 통화처럼 보이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공공재적 성격이 강화된다. 그래서 중앙은행이 사실상 최종 신뢰 형성자로 편입된다. 이 점이 바로 하이에크적 시장 기반 통화 경쟁론을 넘어서는 제도설계의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하이에크류의 자율 경쟁 통화가 아니라 정교한 제도와 감독 및 기술 기준을 요구하는 디지털 공공 시스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테이블코인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그것은 민간 통화가 아니라 국가와 긴밀히 연결된 새로운 통화 인프라의 성격을 띠게 된다. 중앙은행과 금융감독당국의 역할이 더욱 확대되고 중차대하게 된다. 하이에크의 시장 기반 민간 통화론을 넘어서는 제도설계가 지금 필수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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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홍균 객원논설위원 |
●조홍균은
법·제도경제학자이자 35년 경력 중앙은행가. 경제, 금융, 기업 관련 정책과 제도를 주로 천착했다. 통화금융정책, 금융체제, 금융감독, 금융산업, 기업정책, 법경제 실무와 이론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중앙은행과 정부, 국제기구, 학계, 언론계 등에 걸쳐 폭넓게 이력을 쌓았다.
△ 미 워싱턴대 법학박사(J.D./J.S.D., 법경제학) △ 1989년 한국은행 입행 △ 1990년 조사제1부 조사역 △ 1999~2012년 정책기획국 과장 차장 팀장 △ 2016년 금융감독원 거시감독국 파견국장 △ 2017년 한국금융소비자학회 부회장 △ 2018년 한국금융연수원 교수 △ 2022년 경제연구원 부원장 △ 저서: 우리 시대의 금융경제 읽기(박영사, 2025년) △ 현재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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