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지구라는 정원을 관찰하는 본능적 짝사랑"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5-04-18 16:27:46
백두대간수목원에서 일하며 수목과 나눈 다감한 이야기
명징한 언어로 식물들과 일상 섬세하게 서술, 초록빛 위로
"모든 생존 의지 근원을 따라가면 '본능적 사랑'과 만난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나온 시간은 슬펐던 순간이 그렇지 않은 때보다 많았다. 나 혼자 숨어 울어야 했던 많은 날 속에서 식물은 나를 구했다. 식물을 탐색하고 그들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내가 또렷하게 알게 된 건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사랑이다. _ '들어가며'
지구라는 정원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공통된 기본은 번식을 위해 모든 것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이기적인 유전자의 번식 본능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일지 모르나, 그러한 의지의 근본을 파고들면 그것은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갈파하는 이가 있다. 이 행성의 생명들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 에너지는 '사랑'이라는 '본능'인 셈이다.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과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도 이 행성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일하는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이 펴낸 두번째 산문집 ' 숲을 읽는 사람'(마음산책)은 그 곡진한 사랑의 기록이다.
그가 자란 시골 마을은 가야산국립공원 안에 있었고, 그에게 가야산은 국립공원이라기보다 동네 뒷산이었다. 다양한 식물을 기르며 어린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다녔던 아버지와 약으로도 음식으로도 활용되는 식물의 다양한 면을 알려주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가 대학에서 목재해부학과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뒤 박사학위까지 받고 민간인 통제선 이북에 있는 DMZ자생식물원을 거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이르러 오롯이 식물들과 눈을 맞추며 사는 삶은 자연스러운 행로였던 셈이다. 첫 산문집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2022)으로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그가 펴낸 이번 산문집은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더 가미된, 명징한 언어가 돋보이는 식물들 이야기이다.
-'식물에 대한 물음표로 가득한 30대'를 건너와 돌아본 소감은?
"첫 책 '초록목록'은 풀과 나무에 대한 기록이었다. 식물 한 종 한 종 만나면서 그들 이야기를 받아 쓴다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30대를 통과하고 나니까 이번 책 제목처럼 그게 결국은 숲을 읽는 일이었구나 싶다. 조금 더 덩어리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탈출구 없이 계속 더 빠져드는 느낌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끈으로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다. 복잡다단한 생태계를 보면서 자연이라는 우주의 작은 존재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번식을 위한 이기적인 유전자의 근본도 사랑인가.
"정말 그렇다. 극진한 모성이다. 저는 모성의 절정을 식물, 꽃의 구조에서 찾는다. 동물의 몸이랑 똑같다. 포유류 암컷의 몸이 잉태할 난자를 지키기 위해서 자궁이 있고, 자궁 주변을 장기들이 싸고 있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골반 뼈가 튼튼한 것처럼, 꽃이라는 구조도 장차 씨앗이 될 밑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씨방을, 그 자방(子房)을 꽃받침이 싸고 있고 부수적으로 달리는 게 꽃잎이다. 그 씨앗의 근원과도 같은 밑씨를 지키기 위해서 겹겹이 구조화된 것이다. 수분 매개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향기를 발산하고 더 아름다워지는 이런 행위들을 보면, 식물이 정말 처절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걸 느낀다. 그렇게 지구에 적응한 전략들을 보면 인간은 감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생물은 생존할 수 없는가.
"그것은 의지인데,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지의 근원을 따라가다보면 그게 결국은 사랑이다."
-생존하려는 의지의 근원이 사랑이라는 말, 울림이 크다.
"식물에게 배웠다. 식물의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웃음). 이러저러한 전략이 의지이고 그런 사랑이라는."
-식물과 교감하는 '영매' 수준이다. 봉화군 춘양면 그 산골에서 살다 보면 온통 보이는 게 나무고 식물들일 텐데, 그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면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
"그냥 길을 지나가다 봐도 저게 온통 같은 초록이 아니고 다 하나하나 구분돼서 또 다른 종류로 보인다. 예를 들면 영장류가 모여 있는 걸 하나의 영장류로 보는 생명체가 있을 거고, 또 누구는 비슷한 애들이 뭉뚱그려 있어도 고릴라, 침팬지, 이렇게 다 달리 보는 것과 같다. 산에 가면 모두 알은 체 하느라 바쁘다."
아날로그적인 삶이 나랑 좀 잘 맞는다고 하면 허황된 사치처럼 들릴까. 식물이 나를 지지해준다는 느낌도 받는다. 일단 식물들은 나한테 휴대전화에 이거 설치해라, 저거 설치해라 몰아세우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만나자고 강요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는 식으로 내가 직접 식물을 찾아가도록 이끈다. 식물은 은근히 밀당의 고수다. _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드는 일'
-'밀당의 고수'께서 '밀어내는' 건 어떤 경우인가?
"꽃 보고 싶은데 제가 원할 때 꽃이 피는 건 아니다. 환경이 맞지 않으면 꽃 피는 거 쉽게 건너 뛰기도 하고, 열매를 보고 싶은데도 그렇다. 식물들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한 번도 같은 모습 같은 표정으로 있는 적 없다. 굉장히 미세한 온도 습도 차에 따라서 그날 그날 표정도 다 다르다. 그래서 지겨워질 틈이 없다. 우리가 매년 보는 꽃들도 다 똑같은 꽃이 아니다. 그건 전문가 아니어도 관심과 관찰력이 있으면 보인다. 부모가 자식 표정만 봐도 그런 마음 아닐까. 사랑하는 연인의 표정만 봐도 그런 마음일 것 같다."
그가 갓 스무살을 넘겼을 무렵, 눈이 자주 슬퍼 보이던 아버지는 더 이상 슬퍼지기 싫다고 머리를 깎은 뒤 출가했다. 아버지는 집안 곳곳에 살뜰히 가꾸던 그 많던 식물을 뒤로 한 채 큰 산 아래 어느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고, 서문에 썼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토종 키위라며 깊은 산에서 따온 다래를 손으로 닦아서 입에 넣어주곤 했다. '얼마나 달면 이름도 달다는 뜻의 다래가 되었을까.'
'그 캄캄한 숲의 밤'(1부)에는 그의 일상이 드러난 이야기들이 담겼다. 숲에서 가장 무서운 건 야생 동물이라기보다 캄캄한 어둠이라는 그는 "정원과 베란다와 화분 안에서 식물이 돌봄을 받는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자연에서 자생하는 식물에게도 그만큼 다정했으면 좋겠다"면서 "지구라는 정원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시절을 통과하는 식물이 더 많으니까, 장미를 심고 가꾸는 땅에 찔레꽃이 저절로 들어왔다고 해서 잡초 덤불로 치부하고 뽑아낼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함께여서 가능한'(2부)에도 사라질 위기에 놓인 식물들을 추적하고 기록해 자연을 복원해 나가는 여정이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진설된다. 지난 10일 선종한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1929~2025) 주교와의 인연도 귀하다. 동물과 식물을 지키는 수목원이 당신이 주교로 활동하던 곳에 들어선 걸 퍽이나 반기던 두봉 주교는 "플로라(허태임 천주교 세례명)가 맡은 일이야말로 일종의 성소"라면서 "그 거룩하고 특별한 은총을 씩씩하게 잘 지켜나가라"고 했다. 성소란 말 그대로 신이 임재한 거룩한 장소인 것인데, 주교의 격려는 그에게 큰 용기와 힘을 주었다.
'계절의 경계에 서서'(3부)에서 눈을 맞추는 식물 중에서도 '겨우살이'는 돌올하다. '한 겨울에도 겨우살이는 황금빛이 감도는 녹색을 자랑한다. 그건 지상의 색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다른 행성에서 되쏘는 빛의 파장 같다.' 서구에서도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상록으로 생명의 영속성을 말하는 식물'이고, '행운의 상징이자 액운을 무찌르는 부적'이며 '겨우살이 가지 아래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입을 맞춘다'고 찬탄해왔다.
나무의 위쪽 가지 혈관에 씨앗을 내려 양분을 빨아들이며 생존한 뒤 스스로 광합성을 하고 오렌지와 사과가 섞인 듯한 향을 품은 씨앗을 새들에게 제공해 멀리 퍼뜨리면서, 자신의 숙주도 보호하는 황금색 열매의 주인공이다. 그는 "황금 녹색의 생명체가 둥글게 둥글게 모여 사는 그 외경의 풍경을 직접 본다면, 그 전과 후의 삶은 같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쓴다.
올 봄 경상도 일대를 휩쓴 최악의 산불로 인한 참상을 목도하며 4월 들어 2주 내내 피해 현장을 돌다가 막 복귀한 그는 자신의 책을 그제야 보았다고 했다. 최소한 몇년이라도 두봉 주교가 지금처럼 웃으며 건강하게 지내기를 소망한다고 썼던 책인데, 산불에 이어 그분마저 갔다. 수목원에 연차휴가를 내고 장례 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왔다는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래 처음으로 많이 울었다고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그는 "자네가 죽고 못 사는 그 식물도 자기 새끼 보겠다고 꽃 피우고 씨 맺는데 사람 안 만나느냐고" 묻는 어르신에게 "저도 그게 궁금해서 10년 넘게 관찰했지만 흐드러지게 핀 그 많은 꽃들도 성공하는 확률은 환경이 안좋을수록 낮아지더라"고 속으로 되뇐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애하는 줄 알았는데 짝사랑인 것 같다.
그들 편에 서고 싶고 그들을 대변하고 싶어 환청을 듣게 되고, 아름답다고, 좋아한다고, 그저 존재만으로도 고맙다고 말을 걸게 되는 그런 증상. 증세가 드러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의 감정은 들쑥날쑥 기쁘기도 슬프기도 설레기도 아쉽기도 하고 때로는 황홀해지기도 한다. …나의 짝사랑은 더욱 깊어갈 것이다. _ '짝사랑도 병인 양 하여'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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