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은 형제끼리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배터리, 수소, AI 등 신산업은 동업이 꼭 필요 재계서열 30위인 영풍그룹의 72년 동업 관계가 깨질 상황에 다다른 것 같다. 영풍그룹은 1949년 고(故)장병희, 고 최기호 두 창업주의 동업으로 시작해 3대째 두 가문의 동업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을 두고 두 가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최근의 움직임을 정리해 보면 지난달 5일 고려아연 이사회가 있었다. 이 이사회에서 한화 H2 에너지 유에스에이에 대한 3자 배정 유상 증자가 결정됐다. 증자 규모는 고려아연 지분의 5%에 달했다.
그런데 11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장氏 측의 유일한 이사인 장형진 회장이 불참했고 나머지 10명 이사 전원은 유상 증자에 찬성해 통과됐다. 그러자 장氏 측은 지난달 30일 시장에서 고려아연 주식 6402주를 37억 원에 매입했다. 지분율을 0.03% 높인 것이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장氏 측에서 유상 증자를 반대했고, 그럼에도 유상 증자를 강행하자 지분율을 높이면서 지배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분상으론 장氏 측이 유리하지만 이사회는 최氏측이 장악
고려아연은 ㈜영풍이 26.1%, 장氏 측이 31.3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영풍 역시 장氏 측이 5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아연에 대한 장氏 측의 지분율은 단순 계산으로도 57% 이상에 달한다.
이에 비해 최氏 측에서는 고려아연 대표이사인 최윤범 부회장이 14.79%만을 보유하고 있다. 한화 측 지분이나 자사주 6% 등을 모두 최氏 측에 우호적인 지분으로 계산하더라도 장氏 측의 동의 없이는 계열 분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변수가 있다. 첫 번째는 이사회에 대한 최氏 측의 장악력이다. 고려아연은 처음부터 최氏 측에서 경영을 맡아왔기 때문에 임직원과의 관계가 깊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번 이사회에서 11명의 이사 가운데 1명을 뺀 10명 모두가 장씨 가문에서 반대하는 유상증자에 찬성한 것도 이에 대한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이사회 장악은 유상증자나 CB 발행을 통해 상대방의 지분을 희석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2차 전지, 폐배터리, 수소 사업 분야에서 백기사 찾기는 어렵지 않을 듯
두 번째 변수는 현재 산업 구조로 볼 때 최氏 측에서는 한화 H2처럼 자신들의 편이 돼 줄 백기사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고려아연은 아연 제련에 있어서 세계 1위 업체이다. 이 과정에서 2차 전지의 소재나 폐배터리 재활용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다수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수소 분야도 기존 사업 분야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고려아연 측의 설명이다. 따라서 협력사업이나 합작사업 명분으로 또 다른 백기사를 끌어와 지분 장악력을 높일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까지는 증권시장에서 싸움 붙여서 주가가 올라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다. 실제로 두 가문은 지금까지 계열 분리나 동업 청산을 부정하고 있다. 다만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LG그룹의 구氏와 허氏 가문이 순조롭게 동업 관계를 청산하듯 그런 이별의 수순을 밟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지분 경쟁을 벌이게 된다면 잠시 주가가 올라 그걸 노리는 세력들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고려아연의 경쟁력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업은 형제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일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동업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 동업은 형제끼리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동업은 1+1=2가 아니라 1+1=3 이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업에서 서로가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며 성장할 수 있는 황금조합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LG가 구氏와 허氏가 힘을 합쳤고 마이크로소프트도 사업 초기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공동으로 창업했기에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가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역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또 같은 동양 문화권인 중국인들도 사업에서 동업이 상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미국의 차이나타운이 코리아타운을 잠식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동업으로 덩치를 키우고 경쟁력을 앞세웠기 때문이라는 게 정답처럼 여겨지고 있다.
서구 사회는 계약에 근거한 동업, 중국은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동업
우리는 동업을 시작할 때 서로 뭐든 양보할 듯이 한다.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 같이 시작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업이 잘되면 그것은 내 공로고 사업이 삐거덕거리면 상대방을 탓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정한 게 없으니 갈라서야 하는 시점에서도 어떻게 나눌지를 두고 다툴 수밖에 없다. 만나지 않으니만 못한 상태로 이별하는 게 지금까지 경험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는 비정하리만치 철저하게 처음부터 내 것, 네 것을 구분한다. 계약에 근거한 동업이기 때문에 계약서 대로만 진행하면 서운할 일도 억울할 일도 없는 것이다. 중국인의 동업은 철저한 위계질서로 이뤄지고 동업 정신을 해친 사람은 누구와도 동업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지배하고 있다.
동업을 활성화하는 문화적 토양이 마련돼야
2차 전지, 수소, AI 등 신산업이 뜨면서 사업 초기 단계부터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동업이 필수적인 시대를 맞고 있다. 사업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점에서는 각기 다른 분야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서로 한 데 모여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종잣돈이 있어야 한다. 또 성공을 믿고 마케팅으로 힘을 보태는 동업자도 있어야 한다.
동업이 형제와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의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다만 동업은 언젠가는 이별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계약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김기성
△ 서울대 사회학과 △ SBS 경제부장 △ SBS 뉴욕 특파원 △ SBS 보도제작국장 △ SBSCNBC 대표이사 △ TV조선 뉴스센터장 △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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