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열의 AI경제] 인공지능 시대의 새 화폐, '토큰'이 온다

KPI뉴스 / 2026-04-02 11:15:42
AI시대 가치기준은 '연산력'…토큰경제 본격화
기술 투자와 인재 확보가 국가의 운명 가른다

토큰(token)이란 단어를 보고 버스 승차권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일 가능성이 크다. 종이로 된 회수권과 함께,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엽전 모양 동전을 버스 기사 좌석 옆 플라스틱 통에 획 던져 넣던 기억은 386세대의 것이다. 스마트폰과 교통카드를 주파수 비접촉 방식(NFC)으로 '삑' 소리를 내며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MZ들은 오래된 영화나 뮤직비디오에서 실물을 한번 봤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추억의 토큰이 새로운 경제의 화폐단위라고?


인공지능(AI) 시대의 토큰은 디지털 언어의 단위를 말한다.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 같은 대규모언어모델(LLM)은 자연어 빅데이터를 사전에 대량 학습해 사람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고성능 최종 모델로 완성된다. 이때 언어모델이 텍스트를 읽고 쓰는 최소 단위가 토큰이다. 토큰은 언어학에서 문장과 단어를 구성하는 음절과는 다르다. 한국어는 1글자가 1토큰이지만, 영어는 0.75단어가 1토큰이다. 즉, 토큰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AI가 연산하는 '정보 조각'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수의 토큰을 LLM이 입출력할수록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한다. 왜냐하면 토큰은 컴퓨팅 자원의 사용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AI 토큰 관련 이미지 [챗GPT 생성]

 

1개 토큰을 처리할 때마다 하드웨어 자원이 물리적으로 소모된다. 전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전기요금을 더 많이 내는 원리와 같다. 컴퓨팅 자원은 반도체의 연산량, 메모리 대역폭, 캐시 메모리 등으로 구성된다. 반도체를 많이 돌리려면 전력과 물 등 다른 자원도 필요하다. AI 기업은 이 모든 자원을 잡아먹는 토큰 1개당 원가(cost)에 적정 이윤을 붙여 최종 판매가를 결정한다. 싼 가격으로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토큰의 원가 절감에 목숨을 건다. 최근 구글이 내놓은 토큰 절약형 알고리즘 '터보 퀀트(TurboQuant)'는 이 치열한 경쟁의 한 결과물이다.

구글이 반도체 사용량을 기존 6분의 1로 줄이는 AI 알고리즘 '터보 퀀트'를 내놓자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샌디스크 등 반도체 기업의 주가가 순간 하락한 해프닝이 발생했다. 터보 퀀트는 캐시(Cache) 메모리를 압축하는 기술이다. 캐시란 다음에 다시 찾기 위해 입구에 달아두는 작은 문패이다. 두꺼운 책의 내용을 빨리 찾기 위해 가장자리에 다는 띠지라도 생각해도 좋다. LLM은 주인이 시킨 지시를 오래 잊지 않기 위해 장기메모리에 지시 일부를 저장하는데, 이를 KV 캐시라 한다. 그런데, LLM 동시접속자가 늘어나면 GPU 메모리에서 캐시가 차지하는 공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메모리 용량이 동시접속자 숫자를 제한하는 셈이다. 터보 퀀트 기술은 띠지의 크기를 크게 줄여줘 AI 사업자에 호재, 반도체 기업에 악재로 작용했다. 이처럼 연산력(compute)이 주가를 좌우할 만큼 귀중한 희소자원으로 취급받는 새 경제체제를 '토큰 경제(Token Economics)', 줄여서 '토크노믹스(Tokenomics)'라 부른다.

토크노믹스는 AI를 구동하는 '연산력'이 가장 희소한 자원으로 부상하면서 미래의 가치척도 및 거래수단, 즉 돈처럼 취급받을 것이라는 기술낙관론자들의 예언이다. 산업혁명 이전엔 토지, 이후 자본이 최고 생산수단이었다가 디지털사회의 도래와 함께 데이터로 바뀌었지만 AI 시대에는 컴퓨팅 파워가 새 화폐로 부상한 것이다. 연산력 화폐론은 오픈AI의 창립자 샘 올트먼이 2024년 한 언론인과의 대담에서 처음 주장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전문가 김정호 KAIST 교수도 토크노믹스 이론을 펴고 있다. 젠슨 황, 일론 머스크도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올트먼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보편적 기본 연산력(Universal Basic Compute, UBC)' 개념까지 제시했다. 

 

이는 AI 시대에 인간의 기초생계를 보장하는 기본소득(UBI)의 AI 버전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일정량의 연산력을 배분해 AI 접근권을 평등하게 보장하자는 구상이다. 돈 대신 연산력을 배급하는 복지정책이 보편화되는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 싶겠지만, 쌀이나 전기처럼 생활필수품은 지금도 빈곤층에게 거의 무료로 제공된다. 정부가 국민의 인터넷 접근권을 평등하게 보장하는 저렴한 데이터 요금제 출시를 국내 통신사에 압박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연산력, 즉 토큰은 미래의 생필품이요, 화폐인 것이다.

사실 '토큰' 개념의 학술적 어원을 살펴보면 1960년대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처음 발견된다. 행동 치료 및 교육을 할 때 목표 행동에 대한 대가로 보상 토큰을 제공하고, 나중에 실제 물질적 보상으로 교환토록 해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는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다시 2010년대 크립토·블록체인 산업이 출현했을 때 토큰 경제의 생태계 설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체불가토큰(NFT) 그림을 비싼 값에 샀다가 금방 폭락해 울상을 짓는 투자자들의 비극을 뉴스로 접한 기억이 날 것이다. 미시적 심리학과 거시적 블록체인 경제학의 규모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인간 행동의 유인(誘引)이다. 토큰이란 인센티브를 통해 인간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도록 설계하는 도구 내지 기술이다.

보이지 않는 토큰 획득을 위해 개인은 훔치고, 국가는 전쟁도 할 것이다. 누가 컴퓨터 자원을 더 많이 갖고, 쓸 수 있느냐에 권력과 부가 달린 시대. 토큰을 벌어들이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더 많은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는 물적 인프라 확충, 또 하나는 터보 퀀트처럼 토큰의 생산효율을 높이는 고도의 기술이다. 우리는 둘 다 해야겠지만 인프라 경쟁에선 미국, 중국 같은 대국을 이기긴 힘들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있다. 토크노믹스에서도 과학기술에 투자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과기입국(科技立國)은 불변의 정책이 될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미디어센터 VOX(Voice From Oxford) 컨설턴트(2024~) △국가녹색기술연구소 'Greenovation I&I' 편집위원(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2026.3)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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